인목대비 자신은 광해군에게 ‘어머니’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하의 참소만 믿고 자신의 부친을 참살하고 어린 자식을 죽였다고 질타했다. ... 광해군을 폐위시킨 주체들은 폐위된 사실을 나라에 알리기 위해 인목대비가 내린 교서에서 광해군의 저지른 죄악을 나열하고 그 죄악이 폐위의 명분이었다. ... 마지막으로 인목대비는 폐모되었다는 것 이다. 1618년 광해군 일기를 보면 대부분 수십 수백차례의 인목대비에 대한 상소문이 날아들었으나 광해군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도배가
한편 광해군의 임해군 사형과 연이어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유생의 신분으로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이후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등에 반발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승 정구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 등을 수학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정구 사후 인조반정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광해군의 임해군 사형과 연이어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유생의 신분으로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이후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등에 반발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승 정구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 등을 수학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정구 사후 인조반정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의 광해군에 대한 충성은 도를 넘어서게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다. ... 게다가 이 사건은 인목대비의 폐위와 영창대군의 살해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 문묘종사(文廟從祀) 사건 그러면서 북인들이 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 대북세력이 반대세력의 견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박응서(朴應犀) 등이 은을 모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끌어들여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목대비 폐모를 밀어붙인 것은 민생과는 무관한 과거사 집착이자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 광해군도 인목대비에게 원한이 있었지만 폐모는 대북이 다른 모든 정파를 축출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형성하는 결과가 되었다. ... 서인 영수였으나 비교적 당파색이 옅었던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광해군 10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분조 체제아래 조정의 일부를 이끌며 소임에 최선을 다했고 선조가 죽던 1608년 2월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에 따라 왕위를 이어 받았다.
『서궁일기』는 인목대비와 정명공주 모녀가 주도하여 친필과 대필로 쓰여 진 천지인 3권 2책으로 된 전본이다. ... 숙종당시 폐비가 되었던 인현왕후에게 있어『서궁일기』는 대비가 겪은 10 여 년간의 유폐생활과 고초, 괴로움 등은 인목대비의 그 당시의 처지와 그 원인의 발생 동기는 다르다 하더라도 ... 서궁일기가 유일본이라는 것에 대하여 첫째, 인목대비는 유폐시 고초를 겪었으나 인조반정이란 대의명분으로 선조가 살아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지존의 권위가 가장 장엄하였을 것으로 추정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