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고 서 제 목 : 자녀출산에 따른 왕비의 신분적 지위 과 목 명: 학 과: 학 번: 이 름: 제 출 일: 담당교수: 목 차 1. 덕종의 비 소혜왕후 2. 선조의 비 인목왕후 3. 고종의 비 명성황후 1. 덕종의 비 소혜왕후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는..
) 1월 인목대비 폐비. ... 인목대비의 친부인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로 유배. 1614년(광해 6년) 2월 10일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 이의를 살해. 1618년(광해 10년 ... 광해군은 내시 등에 업혀 의관 안국신 집에 숨음. 1623년(인조 1년) 3월 13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인목대비에게 어보를 받아 능양군(인조)이 즉위. 1623년(인조 1년) 3월
갖은 고초를 겪는 내용을 서술하며 인목대비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11년만에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가 복위하는 선과악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 그러나 과연 광해군은 천하의 패륜아 이며, 인목대비는 그저 당하기만 한 선량한 사람인가? ... 포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선량하고 유약한 여성적 기질로 기록되어 있고, 인목대비는 꿋꿋하고 남성적인 소유자로 나타난다.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주동자가 김개시였다. ... 인목대비는 저주사건과 칠서의 역모사건을 거치면서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동생들이 죽음을 당하고 영창대군이 대궐에서 쫓겨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된다. ... 계축년의 이 저주사건은 뒤이은 박응서, 서양갑 등의 이른바 칠서역모사건과 함께 영창대군이 대궐을 나가고 인목대비는 서궁이 갇히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실 최고어른은 인목대비가 되었다. 인목대비는 선조가 죽은 다음날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 인목대비가 이렇게 성급하게 광해군을 즉위시킨 것은 자신의 아들인 영창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 이 여인이 바로 인목대비였다. 그리고 1606년 봄 인목대비에게서 왕자가 태어났다. 광해군과는 다르게 후계자로서 전혀 하자가 없는 적자인 영창군이었다.
그 작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대비의 측근 내인이라는 설 외에 글을 잘 쓰던 인목대비가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내인이 쓴 것처럼 하여 지었다는 인목대비 자작설이 있다. ... 그는 작자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내인설(內人說)을 부인하고 인목대비가 지은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정설이라 할 수는 없으며, 현재로서는 인목대비 측 어느 ‘내인’이라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