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과 이완용
- 최초 등록일
- 2009.03.28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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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을사오적과 이완용
목차
<친일파가 되기 전 이완용의 생애>
<을사오적은 다섯 명인데 왜 이완용이 제일 많이 욕을먹는것일까?>
<이완용 피습당하다?>
<이완용은 애국자?>
<이완용은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들 그리고 땅>
<이완용에 대한 나의 생각>
본문내용
조선 말기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무력행사를 통해 청나라 세력을 꺾고 다음의 경쟁 세력인 러시아를 러일전쟁으로 격파한 다음,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침략 상호 묵인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의 실질적 침략인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주조선일본군사령관인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임금의 앞에서 중신들이 모여 국가 대사를 의논하던 회의.
어전회의에 참석한 각료들을 강압적으로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건강상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토의 강압에 못 이겨 일부 대신들이 찬성을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반대하고 임금께 고하러 가다가 졸도까지 하였다. 당시 총 9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의 대신은 약간의 내용 수정을 한 다음에 최종 찬성하고 서명하였다. 그들은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으로서, 조국을 왜적에게 팔아먹은 매국노 라하여 역사상 `을사오적신`이라 칭한다.
을사조약은 외교권 포기, 통감부설치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대내적으로 감독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어 주권국가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훼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는 의미를 갖는 조약이었다.
<친일파가 되기 전 이완용의 생애>
이완용의 생애는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이 되어 반민족행위를 계속하면서 잔명(殘命)을 보존하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