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 최초 등록일
- 2008.06.25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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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역사-당나라부터 원나라까지 각 중국 역사를 자세히 요약하였습니다.
목차
1. 당나라
1)당 전반기
. 무주혁명과 측천무후
. 당의 율령체제와 균전제
. 모병제로의 전환과 안사의 난
2) 당후기
. 토지제도의 변화-양세법의 실시와 소금전매제
. 황소의 난과 당의 몰락
2. 송나라
. 송의 건국과 문치주의
. 송의 대외관계와 왕안석의 신법
. 송요의 대립과 전연의 맹약
. 금의 화북진출과 송과의 대립
. 왕안석의 신법
. 남송의 건국
. 송의 멸망원인
3. 몽골제국성립과 원나라
. 원의 사회와 경제
. 몽골제국의 성립과 발전
. 무슬림상인과 몽골제국
. 카라코름과 대도
. 원대의 동서문화의 교류
본문내용
1. 당나라
1) 당 전반기
◎ 무주혁명과 측천무후
․ 고종과 황후 왕씨 사이에 자식이 없었는데, 고종이 소숙비를 총애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무씨를 환속시켜 궁중으로 데려오게 된 것임. 그러나 왕씨는 무씨가 자신의 지위마저 위태롭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황후 폐립의 원인은 고종과 자신 사이에 낳은 자식을 살해한 다음 그 죄를 황후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씨의 권력장악은 단순히 그의 강한 권력욕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황후의 폐위와 무씨의 옹립을 둘러싸고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런 당파 싸움을 이용해 무씨가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하던 파는 원로들이었고, 옹립하던 파는 과거 출신으로 가문보다는 고종과 개인적인 관계가 깊은 인물이었다. 이 문제는 관롱집단 대 비관롱 집단, 문벌 대 비문벌이라는 양태를 띠게 되었다.
결국 이 대립은 무후 측의 승리로 결말지어졌다. 무후가 정권을 잡게 되자 인재의 등용에 뛰어났다는 후대의 정평대로 과거출신 관료가 대거 등용되었다. 655년 무후가 황후가 되자 반대파는 모두 좌천되고 당초 이래의 원로는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의 배후에서 고종의 정무에 간여하기 시작했다. 674년에는 고종을 천황, 무후를 천후라 부르게 했으며, 고종이 병이 들자 정무는 무후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고종이 죽고 무후가 낳은 중종이 뒤를 이었지만 무후의 노여움을 사 제위에 오른 지 54일 만에 폐위되고, 동생 예종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정치는 여전히 무후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무후는 690년이 되자 왕망 때와 마찬가지로 마침내 당을 주로 고치고, 스스로 성신황제라 칭했는데, 당시 나이 60을 넘긴 때였다. 이 사건을 ‘무주혁명’이라고 한다.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
705년까지의 정치를 이끈 인물들은 무씨 일족과 과거 관료가 더해져 비교적 평온했다. 그러나 무후의 말년에는 여타 남성 황제처럼 부의 낭비가 심해졌고, 사회의 저변에서는 농민층의 분해와 균전제의 동요 및 부역병의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결국 무후는 그녀의 와병을 틈탄 재상의 핍박을 받아 퇴위하고,
중종이 복위해 당조는 재건되었다. 그러나 중종도 제2의 무후가 되려고 한 위후에 의해 독살되고 만다.
․ 무주혁명의 의의- 무후와 위후의 권력장악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무위의 화’ 혹은 ‘여화’라 불렀는데, 이것은 남존여비사상을 농후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주혁명의 의의는 문벌귀족을 대신해 신흥계층이 정계에 등장했다는 데 있다.
참고 자료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