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건립목적과 의궤목록
- 최초 등록일
- 2008.04.17
- 최종 저작일
-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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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외규장각 건립목적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자료를 번역한 의궤목록입니다.
목차
1.외규장각의 건립 목적
1)외규장각의 건립 시기
2)정조의 왕실 군주론에 의한 외규장각 건립목적
2.약탈 도서 목록
1)분류별 서지사항
2)의궤목록
본문내용
① 외규장각의 건립 시기
정조5년(1781) 3월 ,강화유수 서호수(徐浩修)가 왕명을 받아 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연초헌(燕超軒)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강화부 내책고(內冊庫)의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고, 또 서울 궁성으로부터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왔다.내책고는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들의 보관을 위해 1753년 유수 신사(申思)가 객사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1778년(정조 2년)에 반고어사(反庫御史) 심엄조(沈念祖)는 이곳의 군기별저처사(軍器別貯置事)를 감사하면서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선적(璿籍), 어필, 어제, 금보(金寶), 옥인(玉印), 죽책(竹冊), 교명(敎命), 전장(典章)의 문자(文字), 문부(文簿)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칠 정도”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왕은 이 보고를 받고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사각(史閣)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는 찬사 속에 외규장각 설립의 뜻을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정조6년(1782)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지어 효종대 이래 강화도의 내군기(內軍器)에 보관하여 온 역대 군주의 친필, 교명(敎命), 선보(璿譜: 왕실의 족보) 등을 옮겼다.
외규장각은 이런 경위를 배경으로 1781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어, 1782년 2월에 건물 준공을 본 뒤 4월 2일을 길일로 잡아 직제학 심염조, 검교 직각 서정수가 배진관으로 봉안사와 찰리사의 직함을 받아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과 대비전과 혜경궁과 정조의 책보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어제·어필로 사고에 흩어져 있는 것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여, 어제·어필은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에만 봉안하도록 하였다.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은 정조 1781년 3월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준공되었었다. 정조 즉위 직후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규장각 건물을 세우고, 이듬해인 정조 원년(1777)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삼았다. 정조 5년 3월 규장각의 사무청사인 이문원(理文院)을 구(舊)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긴 뒤,
참고 자료
파리국립도서관 소재 외규장각 도서의 현황과 내력 / 이태진 / 서울 국제법 연구(제2권) 1호 95.5 / P105- P128
외규장각 도서, 무엇이 문제인가 / 서울대학교 규장각
왕조의 유산 - 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 이태진 / 지식산업사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 역사스페셜 / KBS방송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