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과연 폭군이였는가
- 최초 등록일
- 2007.09.16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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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이긴자가 그린 역사
2.신라 왕자에서 반란 지도자로..
3.궁예에게 귀순한 왕건부자
4.궁예의 사민(徙民)정책
5.호족세력 왕건과 진골세력 궁예
6.실패한 정치가 궁예
본문내용
1.이긴자가 그린 역사
일본 속담에 “이기면 관군(官軍),지면 반군(叛軍)이다”란 말이 있는데 이는 비단 일본에서만 진실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속에서 이긴자가 곧 정의임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궁예(弓裔)로부터 국가 권력을 빼앗은 방법은 쿠데타를 통해서 였다. 따라서 고려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고려 초기의 역사가들에게는 궁예의 인물됨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기술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궁예의 실정이 지나치게 과장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려사>에는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기마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고 야밤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혔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에워싸고 나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달리면서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드셨다’고 외치도록 하였다. 이에 달려와 합세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라 ‘왕공이 때를 얻었으니 내 일은 끝났도다’하였다. 그리고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 하여 미복 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하였다. ······ 암석 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지새느라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었다. 이윽고 부양(철원근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궁예의 최후는 한 나라를 통치했던 지배자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비참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 나라의 통치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예를 배반한 이들의 명분은 궁예가 형벌을 제멋대로 하여 처자와 신하들을 살육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이다. 궁예는 왕후 강씨가 다른 남자와 간통했다며 성기를 불로 지져 죽였으며 두 아들도 살해하였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1,신라의 쇠퇴와 후삼국,국사편찬위원회, 1996
김창헌 외, 고려500년 의문과 진실, 감영사, 2001
이덕일·이희근,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2000.감영사
이재범, 슬픈궁예, 푸른역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