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산록을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07.06.13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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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풍수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고 되어 아침 일찍 학교에 모여 관광차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은 한산이씨 이기묘와 세종대황릉, 명성왕후 생가 등 양택지 답사였다. 현지에서 젊은 사람들도 힘든 산을 오르내리시며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30대 청년다운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장 답사 후 간산록에 대한 레포트를 정리하면서 교수님의 저서 ‘반평의 진리’의 책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어 봄으로써 풍수지리에 대하여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목차
1. 이기묘
2.세종대왕릉
3. 명성황후 생가
본문내용
풍수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고 되어 아침 일찍 학교에 모여 관광차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은 한산이씨 이기묘와 세종대황릉, 명성왕후 생가 등 양택지 답사였다. 현지에서 젊은 사람들도 힘든 산을 오르내리시며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30대 청년다운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장 답사 후 간산록에 대한 레포트를 정리하면서 교수님의 저서 ‘반평의 진리’의 책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어 봄으로써 풍수지리에 대하여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1. 이기묘
1)소개
ㆍ1522(중종 17년)~1600(선조33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자는 가의, 호는 송화. 지란의 아들이다.
ㆍ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하였고, 생원시에 이어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장령, 1576년 수찬을 역임한 뒤 전한이 되어 편수관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 하였다. 그 뒤 1571년(선조4)직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승지에 올랐으나 노모가 원주에서 병으로 눕자 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도록 1573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승지가 되었다. 1578년 다시 양주목사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경기감사에 의하여 조정에 보고되었다.
ㆍ1583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부제학을 역임한 뒤 장흥부사를 거쳐 1591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여섯 째 아들인 순화군 보를 보필하면서 강원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