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레포트 - 개심사
- 최초 등록일
- 2015.10.24
- 최종 저작일
-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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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연혁
2. 입지 및 지형지세
3. 배치설명
4. 건물별 특성 및 구조
5. 건축적 의미와 가치
본문내용
들어가기에 앞서 개심사를 선정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사철들을 살펴보면 수덕사, 해인사, 화엄사, 부석사 등이 있다. 이 사찰들은 대규모 사찰이다. 사찰 내부의 배치를 통해 위계감이 잘 드러나 있다.
사찰들의 대규모의 공간과 그 공간 사이의 배치들 이 위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개심사는 위의 사찰들과는 다른 여건을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대지와 협소한 공간들 사이에 절과 그 밖의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대규모의 사찰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덕사처럼 위계감을 나타내기가 힘들고 사찰의 전형적인 여러 요소를 끄집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개심사는 개심사만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개심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1. 연혁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14년(654년)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하여 개원사라 칭하였고 충정왕 2년(1350년) 처능대사(處能大事)가 중건하여 개심사(開心寺)로 고쳤다. 개심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적기(事蹟記)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백제 의자왕 14년(654년) 갑인 혜감국사 창건’이라고 전한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과 의자왕 14년인 654년은 시기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갑인’이 지칭하는 연대인 654년이 신빙성이 있으며, 이는 신라 무열왕의 원년이다. 고려 후기의 진정 천책(眞靜 天頙)이 지은 ‘호산록(湖山錄)’에는 “이미 폐사되어 수풀이 무성하나, 절 뒤편에 새로 지은 방 3칸짜리 부도전(浮屠殿)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후기까지 이 절은 폐사의 상태에 있었으며, 그 입지 역시 지형적으로 매우 깊숙한 산림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350년 중창한 개심사는 1475년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서 절이 불에 타버렸다. 이후 성종15년(1484년)에 사찰을 다시 중창하였다. 이는 1941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이 때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