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과 서울사람들의 삶
- 최초 등록일
- 2007.01.10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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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계천의 변화를 통해 알아보는 서울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의 생활모습>을 담은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청계천의 역사
2. 청계천과 서민
3. 나의 생각
본문내용
1. 청계천의 역사
- 청계천의 역사를 통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청계천은 서울의 주요 하천으로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① 조선 건국 이전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부터 청계천은 자연 상태의 하천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주변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서울에서 수로를 정비하기도 전에 이미 청계천은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과 가을에는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아주 컸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② 조선 초기
조선 초기 도성건설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태종 때부터는 개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 초에 자연 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는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 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개천’은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