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의 정책과 대외활동
- 최초 등록일
- 2006.11.25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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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明나라의 3대 황제로서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바로 영락제이다. 분명히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영락제 이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왕위 찬탈자 보다는 明 시대의 훌륭한 황제로 꼽는데 반론을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훌륭한 정치능력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정책과 대외활동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이다.
목차
- 머리말
- 본론 (영락제의 정책과 대외활동)
1.북경 천도
2.몽골족 전벌
3.정화의 남해원정
4.영락대전 편찬
-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이민족인 몽골족의 원조 지배에서 가장 혹독한 민족적 차별과 가렴주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남송의 통치하에 있었던 남인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 전호와 중소농민은 몽골인에 대한 반감이 심각하였다. 그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가혹한 세역을 부담했으며, 지주, 상인, 고리대자본가의 이중적 수탈을 받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원말의 농민반란이 주로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진행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계있다.
원말의 농민반란을 정신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백련교였다. 백련교도는 미륵불 신앙을 믿으며, 특히 붉은 수건을 머리에 둘렀으므로 홍건적이라 하였다. 홍건군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타도 목표는 몽골족과 지주세력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반원, 반지주의 성격이 강하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가난한 농민출신으로 25세 때 곽자흥 군단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내다가 곽자흥 군단과 결별한 후 독자적 세력으로 발전하면서 지금까지의 백련교도 특징인 반지주적 입장을 포기하였다. 이를 통해 강남 지주세력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이 주원장이 명을 건국할 수 있었던 사회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들 강남지주집단 이외에 주원장과 동향출신의 무인집단 세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남경에 도읍하여 명을 창건하였다.
이로써 원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카라코룸으로 도읍을 옮기고 북원으로 지속된 몽골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1378년 이후 성인이 된 아들부터 순차적으로 북면 및 내지의 요충에 번왕(번왕)으로 분봉하여 최후에는 25명의 제왕이 생겨났다. 이들 제왕은 그 봉지에 왕으로서의 정부를 열었다. 이들은 토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은 없었으나 다수의 군대가 지급되어 제국방위의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국가의 안정을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에 역행하는 기능을 나타내기도 했기 때문에 황제자리의 계승문제를 발단으로 결국 ‘정난의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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