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최초 등록일
- 2006.11.13
- 최종 저작일
- 2006.09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신의 죽음과 위버멘쉬 사유
힘에의 의지 사유
영원회귀 사유
본문내용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고 가르친다. 지금 내게 너의 최대 적은 바로 자신, 현실에 안주하고 순응하려는 자신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쳐주고 있다. 이 힘의 의지에는 복수적인 성격이 있고, 그것은 복종과 명령의 형식으로 목표 지향적이다. 힘 의지는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지만, 이분법에서의 존재는 될 수 없다. 힘 의지는 오히려 역동적이고 그 자체로 복수로서 조직된 힘들의 중심이며, 이 힘 중심들의 싸움관계를 통해 세계의 무엇과 “어떻게?” 가 결정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극복하며 살아갈 인간에게 허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언했다. 나는 가끔 내가 이렇게 노력한 후 그만큼의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그 허무함은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을 하곤 한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난 후 오는 허무감이랄까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간 후 그 허무함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예언한 것이다. 이러한 허무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영원회귀 사유로 극복하려고 한다. 영원회귀,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내게 어려운 말이었다.
영원회귀 사유
영원회귀는 세상만물은 온갖 유전과 방랑, 이합집산을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주의 법칙을 말하다.
영원회귀에 대해 난해함을 느끼며 지난 학기 불교에 대한 수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사상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영원회귀는 아니었을까? 니체가 인도나 중국,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 신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쯤 원효나 의상과 같은 승려가 되어 있진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불교는 존재의 시원을 창조와 피조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즉 우주를 움직이는 질서의 원리가 절대적 타자의 자애나 분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결정하고 창조해 나가는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