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정치 사상]마키아벨리의 생애 조사와 군주론
- 최초 등록일
- 2006.08.17
- 최종 저작일
- 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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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마키아벨리의 생애
2. 시대적 배경
II. 본론
1. 군주론에 대한 도식화
2. 요약
3. 문제제기
3.1 마키아벨리는 전쟁광이었는가?
3.2 귀납법의 오류
3.3 지배자 외의 요소에 대한 간과(看過)인가?
3.4 근대정치사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가?
III. 결론
본문내용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인 그는 프랑스 왕의 후원 아래 이탈리아에서 한창 ‘혁명’을 일으키던 중이었고 26살의 이 혈기왕성한 청년과 마키아벨리는 3번의 만남을 갖게 된다.
운명의 장난인지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무서운 기세로 상승하던 도중과 무서운 기세로 하강하던 모습까지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평소 피렌체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약게 구는듯한 방식에 이를 갈던 마키아벨리에게 체사레 보르자 식의 외교 정책에서 경악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교황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다소 무례하면서도 고압적인 태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대담함과 빠른 결단력은 통치 능력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모양만 바꾸어 위기를 비켜나가는 방책을 사용하는 피렌체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탈출구였던 셈이다.
군주론에서 비판한 용병제도는 체사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용병제도를 믿지 않고 국민개병제도의 도입을 실행하고, 사랑을 받으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등의 주장은 체사레가 이탈리아를 병합해 가면서 보인 행동과 지나치게 흡사하다.
‘위대한 시침떼기’라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에 능수능란했던 체사레의 능력을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아래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는데
“로마냐 지방을 정복했을 때 공작은 이 지방이 국민을 올바로 다스리기보다는 그들의 것을 탈취하고, 국민을 결속으로 인도하기는커녕 분열의 원인을 만드는 그런 무능한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싸움은 물론 온갖 폭력이 기세를 떨쳤던 것이다. 공작은 이 지방에 평화를 회복하고 군주의 지배력을 높이려면 좋은 정치를 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냉혹한 가신 레미로 데 롤카에게 큰 권한을 주어 로마냐에 파견했다. 그는 단기간에 이 지방에 평화를 회복하고 대단한 명성과 더불어 통일을 이룩했다. 공작은 데 롤카 대신 자기가 민중의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렵고, 이 이상 그에게 과도한 권한을 맡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