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남명학파의 흥망성쇠
- 최초 등록일
- 2006.05.26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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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명학파(南冥學派)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영남유학(嶺南儒學)을 양분하여 형성한 것으로 여러 문인(門人)들을 배출하였다.
목차
머리말
Ⅰ. 조식과 남명학파
1. 조식의 가계와 생애
2. 조식의 시대
3. 남명학파의 형성과 사상
Ⅱ. 남명학파의 의병활동
1. 의병활동의 배경
2. 남명학파 주요 의병장의 활동과 의의
Ⅲ. 남명학파의 흥망성쇠
1.광해군대의 북인
2.인조반정 이후의 북인
맺음말
본문내용
서론
남명학파(南冥學派)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영남유학(嶺南儒學)을 양분하여 형성한 것으로 여러 문인(門人)들을 배출하였다. 남명학파는 하학(下學)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實踐)에 바탕을 둔 출처관, 경(敬)과 의(義)사상, 성리학적 학문, 실학, 예학, 교육사상 등을 바탕으로 보다 진보적인 사림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조선 중기의 주요한 학통을 이었다.
남명학이 조선시대 명종(明宗)·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연간에 있어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시대가 내려올수록 남명의 사상과 그 학파의 후예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는듯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학파의 연원(淵源), 학풍(學風)과 그 문인들, 그리고 광해군과 함께한 남명학파의 흥망성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남명학파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Ⅰ. 조식과 남명학파
1. 조식의 가계와 생애
조식은 자(子)가 건중(楗中)이고 호는 남명(南冥)이다. 그의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창녕 조씨는 고려 때 번창하였으나 증조부 조안습이 생원으로 삼가현(:현재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판현으로 낙향하였다. 조부 조영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 조언형과 숙부 조언경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일단 이루어진 셈이다.
조식은 성품이 강직하였는데,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부친의 성격이나 숙부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을 당하는 모습에서 의기(義氣)의 가풍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조모는 지족정 조지서(?~1504)의 누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세자일 때의 사부(師父)로서 권학(勸學)을 힘써 했으므로 연산군으로부터 미움을 사고, 갑자사화 때 그의 지나친 강직한 성품과 정치원칙에 충실하려는 태도 그리고 선진 사림파라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에서 정성근과 조지서는 효수(梟首)를 당한다. 같은 영남 사림파로서 사화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비슷하나 시기적으로 대개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에서 피해를 입는 것과는 약간의 대비가 된다고 하겠다.
참고 자료
오이환. (한국의 사상가 10人)남명 조식, 예문서원, 2002
경상남도. (경남정신의 뿌리)남명 조식선생, 경상남도, 2000
권인호.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최석기. 나의 남명학 읽기, 경인문화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