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최초 등록일
- 2006.01.08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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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보수와 진보 논쟁에 관한 관점으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독후감.
목차
없음
본문내용
우선 이 책을 통하여 예전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사책에 등장하던 송시열이란 인물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함께 새로운 측면을 비롯하여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가 일생을 살았던 시대는 인조반정문제나 인조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아 북벌을 외치던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 이를 둘러싼 예송논쟁을 비롯하여 조선조 최고 당쟁의 시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쟁의 시기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고, 송시열은 조선시대 최대의 당쟁가로 서슴없이 온몸을 당쟁에 내던졌다. 논란의 양극단에는 항상 다른 당파들이 있었고, 각 당파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저주했고 이런 증오와 저주의 결과로 결국 송시열은 83세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사사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인들의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끌어내리려는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신하에 의해서 한 나라의 임금이 바뀌고, 또한 그들은 명나라를 향한 의리란 뜻의 항명대의 또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리란 뜻의 숭명의리를 드높였다. 이러한 친명배청의 정책의 결과 삼전도의 치욕을 낳은 꼴이 되었고, 이후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문제와 시간이 흘러 귀국 후의 소현세자와 세자비를 비롯한 자식들의 비운의 죽음이 이어졌고, 인조를 이어 효종이 왕에 즉위되면서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은 드디어 출사길에 올랐다. 송시열을 조선 역사상 최대의 당쟁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조정에 출사해 정승의 임무를 수행한 날은 49일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간은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문인들을 길렀으며 배후에서 집권당인 서인과 노론을 조종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인조, 그리고 둘째 아들로서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자리를 차지한 효종으로서는 산림의 지지 여부가 왕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지주가 되므로, 송시열에게 자주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송시열이라 함은 국사책에서 효종과 함께 북벌을 함께 외치던 인물로 배운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으나,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 무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무력 북벌론이 아니라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적인 북벌론이자 제한적 북벌론에 그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 자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