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히로히토 천황과 전쟁책임
- 최초 등록일
- 2005.11.04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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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히로히토 천황과 2차대전 전쟁책임론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서론
2.히로히토 천황의 면죄부
3.미국은 왜 면죄부를 주었는가
4.히로히토의 죄상
5결론
본문내용
2차대전은 남북 7천키로미터, 동서 1만키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전역에서 전사자 117만명, 부상자 461만명, 일반 시민의 사상자 678만명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고 결국 일본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결국 8월 15일 종전조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종전조서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패배, 항복이라는 단어가 없는 항복선언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수뇌부는 항복과 패배라는 단어 대신, ‘성단(聖斷)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싸움을 그만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럼 왜 패배라는 대신 ‘성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가,
성단이라는 것은 성스러운 결단이다. 왜 성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천황인 히로히토가 악랄한 미국의 원자폭탄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성스러운 결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히로히토는 자애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로서 탈바꿈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일본 수뇌부는 천황제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히로히토천황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시작한다. 먼저 패전후 설립된 히가시 쿠니내각은 천황을 보좌하지 못해서 천황이 성단을 내리게 했다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GHQ가 들어오기는 9월전에 모든 전쟁관련 문서를 소각한다. 천황으로부터 내려온 명령이나 명령체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1945년 9월 2일 항복조인식이 이뤄지면서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용한다. 그리고 일본에 상륙한 연합군에 의해 맥아더를 주축으로 하는 극동군사재판이 벌어진다. 다른 말로는 동경재판이라고 하는 극동군사재판에서 가장 관심이 모였던 것은 바로 천황의 전범처리문제였다. 1차리스트에서는 히로히토천황도 전범리스트에 들어 포함되어져 있었다. 하지만 최종리스트에는 히로히토는 포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수뇌부의 끊임없는 로비와 조작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히로히토-기억의 뒤편 (에드워드 베르지음, 을유문화사)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고모리 요이치지음, 뿌리와이파리)
일본인과 천황 (서현섭, 고려원)
kbs 광복60주년 특별 방송- 815의 기억 시리즈 II. 일본은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http://bluecabin.com.ne.kr/index.html-역사광복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