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민족일보와 조용수
- 최초 등록일
- 2005.10.24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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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좋은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당~
목차
1.내용요약
2.감상
본문내용
조용수를 사형대로 끌고 갔던 민족일보에 대해서 알아보자. 4.19 이후 2공화국은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해주었는데 그중 민족일보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제시, 부정부패 고발, 권익옹호, 조국의 통일을 내걸고 발간되었다. 조용수는 민족일보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다수의 사람들의 생활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일에 동조하지는 않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다고 하였다.
민족일보는 통일문제와 지역문제를 민족일보를 통해서 습득하게 되었다. 민족일보가 정신적 지주로 삼은 것은 독립정신이었다. 통일의 열망하는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민족일보에는 농촌의 비참한 생활상을 특별 취재반을 만들면서 매우 세세하게 소수의 사람들을 담아내었다.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진보적인 논저로 민족일보는 창간 한달만에 판매 1위를 달성하였다. 사장 조용수는 남다른 열정으로 민족일보를 만들어나갔다. 직접 현장취재는 물론 자신의 사설까지 실어냈다.
조용수는 일본으로 유학까지 가서 신문사에서 일을 했다. 1959년의 재일고표의 북성에 맞서 민간의 간부로써 그 반대 투쟁에 앞장을 섰다. 그 무렵, 조용수는 이영근과 만나면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다.
3.15부정 선거로 조국은 암울하기만 했다. 그러나 3.13부정 선거로 촉발된 독재 항거는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신이 발견되면서 폭발했다. 학생 시위가 전국을 뒤덮었다. 제 2의 해방.. 전국을 뒤덮은 새시대의 열망속에 혁신계의 보건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새 헌법에 따라 총선거 일정이 공개되고 사회대중당으로 집결하였다. 사회대중당은 자주적인 외교, 정치의 자유과 부의 공정한 분배등을 부각시켰다. 조용수가 귀국한 것은 선거를 앞두고였다. 그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지만 낙선하고 만다. 선거 이후 혁신계는 분열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조용수는 혁신계의 의견을 대변할 대중일보를 창간하고 논의를 주도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