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회담 및 얄타회담
- 최초 등록일
- 2005.09.30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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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카이로 회담
주요 내용은 ①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② 3국은 `야만적인 적국에는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포명하였다`. ③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3국 모두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다`. ④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諸島)를 박탈하고, 또한 만주 ·타이완[臺灣] ·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驅逐)한다`.
얄타회담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다른 패전국이나 해방국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얄타 회담은 "해당 지역의 모든 민주 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한 임시적인 정부조직을 구성할 것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의지에 책임을 지는 정부를 수립할 것"을 합의했으며,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루블린 소재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승인하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 중 아무도 자국이 지지하는 폴란드인 단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폴란드의 신정부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수립하며 자유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장래의 폴란드 국경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극동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한다는 데 동의했다. 국제연합(UN) 헌장의 초안이 이미 작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얄타 회담 참석자들은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 방식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했다. 소련의 16개 공화국 모두가 UN 총회에서 회원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종래의 주장을 철회했다.
1946 년에 공표된 얄타 협정은 미국에서, 특히 폴란드·독일·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국무부의 친소집단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비난과 함께 그가 회담 당시 병에 걸려 무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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