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 최초 등록일
- 2005.09.27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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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을 가리킨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한다.
각 소국에는 우두머리가 있는데,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臣智)·읍차(邑借)라 불렀다. 이들 소국은 다수의 읍락(邑落)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심 읍락인 국읍(國邑)은 각 읍락간의 물자교역의 중심지이고, 국읍의 주수(主帥)는 대내외 교역활동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 읍락을 통솔하고 유사시에는 군사활동의 지휘권까지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 소국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성립시켰다고 보는 삼한이동설의 입장도 있으나, 대부분은 선주(先住)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 삼한이 대두했다고 본다. 즉, BC 3,2세기 중남부 지역에 좁은놋단검[細形銅劍]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는데, 더욱 선진적 정치집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충남·전라 지역에 밀도있게 분포함으로써 이들이 마한 소국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BC 1세기 이후 위씨조선계 유민과 문화의 유입, 철기의 보급, 부여계 유이민 집단의 정착 등의 정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권이 형성됨에 따라 청동기문화 단계의 마한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한강 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目支國)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으며, 이후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점차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편제 질서를 확립해간 것이다. 백제의 마한지역으로의 영역확장을 고고학적으로 보면 한성 Ⅰ기(3세기 중후반)에는 동으로 원주, 남으로 천안~홍성을 연결하는 선 이북, 한성 Ⅱ기(4세기 후반)에는 금강 이남까지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박순발 2001).
참고 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정종태 - 호서지역 장란형토기의 변천양상
최성락 - 마한론의 실체와 문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