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주기철
- 최초 등록일
- 2005.06.24
- 최종 저작일
- 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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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글입니다.
인생과 신앙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성장기
2. 성령체험과 목회의 길
3. 신사참배 거부
4. 투옥 생활
5. 유언과 순교
6. 결론
본문내용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인 십계명에 따라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올곧은 소신과 꿋꿋한 실천으로 훗날 큰 평가를 받는 이다.웅천 1동) 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웅천은159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 시(소서행장)가 웅천성에서 수많은 왜군을 이끌고 조선 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주기철은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지금의 진해시 웅천1동) 에서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재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이름은 주기복이었다.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다시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 학교에 입학,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소년 주기복은 처음 서당에 다니다 1906년 주기효가 천도교 사상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운 사립 개통(開通) 소학교에 사촌 주기용과 함께 다녔다. 주기용은 뒷날 오산학교에도 함께 진학하여 남강 이승훈의 사위가 된이다. 일본의 조선합병이 구체화되자 전국에서 토론방식의 윤강회가 열렸는데 개통학교의 어린 주기철은 돋보이는 연사로 활약했다. 이 무렵 주기철의 가문은 큰형 주기원을 필두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소년 주기복도 1910년부터 웅천읍교회에 나가면서 이름을 주기철로 바꿨다. 1913년 민족운동가 남강 이승훈이 세운 평안남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했는데 경남 출신의 첫 유학생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