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삼국의통일과정
- 최초 등록일
- 2005.06.07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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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① 신라의 발전
② 7C초 신라의 대당 외교 정책
③ 백제의 멸망과 당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설치
④ 백제 부흥군의 저항과 고구려의 멸망
⑤ 고구려 부흥군의 저항과 나-당 전쟁
⑥ 삼국통일의 결과
본문내용
③ 백제의 멸망과 당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설치
7C 중반 성립된 신라와 당 사이의 군사적 동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돌궐과 말갈, 왜를 끌어들여 대립함에 따라, 동아시아 세계는 동서남북 대립구도의 국제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십자 대립구도로 인하여 동서, 남북의 각 진영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나, 653년 신라의 김춘추가 구 귀족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나-당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통일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 하였다. 결국 660년 3월, 당은 13만 수륙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서쪽 측면을 공격하는 한편, 신라는 5만 군사를 동원하여 계백(堦伯)이 이끄는 백제군과 황산벌에서 대치하였다. 이 전투에서 군량 수송의 역할을 맡은 신라군에 대하여 백제의 계백은 네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신라군 사기 상승을 위한 화랑(花郞)들의 자살 공격과 이를 이용한 신라군의 후방 기습으로,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백제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결국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지연작전을 펴 보급로가 긴 당군의 퇴각을 노렸던 백제의 작전은 실패 하였고, 더 이상의 군사적 방위력을 상실한 백제는 사비성(泗泌城)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멸망은 백제를 먼저 정복하여 고구려를 통합하는 기반으로 삼으려는 신라의 의지와, 고구려의 후방을 견제하려는 당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에서 비롯된 전쟁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당 연합군의 이해관계는 백제의 멸망 직후, 당이 백제의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함에 따라 갈등을 겪게 되었으나, 요동에 건재해 있는 고구려와, 활발한 저항운동을 전개하던 백제 부흥군에 의하여 나-당 양국의 충돌은 미뤄지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