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진승오광의 난을 통하여 알아본 민중의 역할
- 최초 등록일
- 2005.05.31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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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난 배경
-진승오광의 난의 사상
-진승오광의 난이 실패한 이유
결론
본문내용
1. 민중이 난을 일으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경우 민중은 지배세력의 여러 억압에도 꿋꿋이 버티며 살아간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그 수가 많다보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커다란 계기가 있지 않는 한 그들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쉽게 뭉쳐지지 않아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지 않은 이 일이 진나라 2세 원년 7월 처음으로 발생한다. 무엇이 이들을 한데 뭉치게 하였을까? 그것의 발단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 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잔혹하게 민중을 착취하고 압박하면서 모든 사업을 십수 년이라는 단기간에 완성시켰다. 넓어진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군대와 대규모적인 전쟁을 일으켰고 엄청난 규모의 토목건축등도 끊임없이 벌였다. 이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민중들로부터 막대한 조세와 부역을 부담시켰으며 특히 부역은 예전의 몇 십 배에 달했다고 한다. 병역에 복무하는 사람도 남자의 1/3을 넘었다. 이들은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굶주리기 시작했다. 또한 ‘하늘 아래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다’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합법적으로 농민의 토지를 수탈하여 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도적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게다가 시황제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황제 호해는 더더욱 폭정을 일삼아 농민들의 압박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과 같았다. 시황제가 죽은 다음해(B.C.209) 하남성 양성 사람 진승과 양하 사람 오광 등 9백 명이 징용되어 고향을 떠나 북쪽 변방인 어양(현재 북경부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참고 자료
「중국완사 상」 이진복 김진옥 옮김 학민사
「중국사이야기」김구진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