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형왕릉 단성에서의 농민항쟁 단성향교 문익점과 면화시배지 단속사(斷俗寺)터 남명 조식과 산천재 내원사
- 최초 등록일
- 2024.02.25
- 최종 저작일
- 2024.02
- 4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전)구형왕릉 단성에서의 농민항쟁 단성향교 문익점과 면화시배지 단속사(斷俗寺)터 남명 조식과 산천재 내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전)구형왕릉 2
Ⅱ. 단성에서의 농민항쟁 14
Ⅲ. 단성향교 21
Ⅳ. 문익점과 면화시배지 25
Ⅴ. 단속사(斷俗寺)터 29
Ⅵ. 남명 조식과 산천재 32
Ⅶ. 내원사(內院寺) 40
본문내용
Ⅰ. (전)구형왕릉
1. 가야사(伽倻史)
1-1. 개관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으나, 이를 발췌한《삼국유사》의<가락국기(駕洛國記)>뿐이다. 이 기록의 내용이 워낙 소략하기 때문에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일본서기》에도 가야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일본인들이 많이 왜곡하였으므로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 伽耶, 伽倻) ㆍ 가라(加羅) ㆍ 가량(加良) ㆍ 가락(駕洛) ㆍ 구야(狗邪ㆍ拘邪) ㆍ 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하였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한 것이므로 이 시기까지 가야란 명칭은 쓰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 ㆍ 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 ㆍ 대가야(大伽耶:고령) ㆍ 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 ㆍ 소가야(小伽耶:고성) ㆍ 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 ㆍ 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으나, 탁순(卓淳) ㆍ 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1-2. 전기가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등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던 바,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붉은 보자기 안의 금합에 6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도간이 이를 집으로 가져간 지 12시간 만에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하였는데, 그 중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였다. 그는 곧바로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5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