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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다각화적 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朝鮮 後期 北伐論과 朝鮮中華主義
ⅰ. 17세기 이후 조선의 상황과 北伐論
ⅱ. 朝鮮中華主義와 그 限界
Ⅲ.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實學者들의 多角化的 解釋 方式
ⅰ. 星湖 李瀷의 청조긍정론과 서양인식
ⅱ. 洪大容의 華夷觀과 毉山問答
ⅲ. 北學派와 北學思想
Ⅳ.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實學者들의 多角化的 解釋 方式, 그 의의와 한계 – 나가며를 대신하여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조선 후기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휩싸여있었다. 양난의 후유증 극복이라는 과제와 중앙 정계의 당쟁 속에서 조선의 주류 성리학자들이 선택한 방식은 바로 조선중화주의였다. 본고의 저자는 조선중화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다. 조선중화주의는 정신적인 승리이자 관념의 세계일 뿐, 현실적인 감각이나 넓은 국제정세에 대해서 무지한 논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실학자들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리나 인식을 제시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불안정한 대내요소들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관념인 조선중화주의에 대해서 알아보고, 실학자들은 조선중화주의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실학자들의 다각화적 해석 방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朝鮮 後期 北伐論과 朝鮮中華主義
ⅰ. 17세기 이후 조선의 상황과 北伐論
조선은 倭亂과 胡亂을 겪으면서 대ㆍ내외적인 큰 위기를 맞았다. 조선은 양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큰 과제를 앉게 된다. 丙子胡亂 이후 朝ㆍ淸 관계는 조선의 일방적인 굴복 속에서 이뤄졌다. 조선은 洪翼漢ㆍ尹集ㆍ吳達濟 등의 3학사와 世子ㆍ鳳林大君과 대신의 자제들을 심양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들은 淸의 강요로 체포되어 호송된 사람도 있었으나, 청의 관원이 직접 조선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굳건해진 崇明思想과 청에 대한 항쟁의식 때문에 反淸감정이 높아졌다. 청이 지시한 연호를 바꾸는 것도 이행하지 않았으며, 중앙과 지방할 것 없이 청의 연호를 쓰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청은 지속적으로 조선에 외교적 압박을 가했고, 결국 仁祖는 동왕 15년 5월에 공사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崇德을 사용할 것을 명했으니 그것은 이 문제로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막자는데서였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祭享祝詞에는 의례히 明의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명이 망한 뒤에도 명 최후의 연호를 사용한 모습들이 보인다. 이것은 반청의식이 쉽게 없어지지 않은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湛軒書
星湖全集
燕巖集
孝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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