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부산총회의 역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22.09.26
- 최종 저작일
- 2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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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wcc부산총회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의 상황에서 전개된 에큐메니컬 운동
2. WCC부산총회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근대 에큐메니컬 운동은 과거 수세기를 통해서 여러 교회들이 서로 접근하면서 서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발전했다. 한국에서도 에큐메니컬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그 시초는 1910년 일제 강점기에 민족운동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협력 한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해 온 것은 한국교회협의회 발족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한국교회의 큰 흐름에서 진행된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와 흐름을 짚어가며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의 활동을 연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WMC라는 대회에서는 14명의 피선교 지역의 사람들이 초청되었는데 이 중에는 조선에서 온 윤치호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에딘버러 대회는 크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종래의 교회 간의 도식, 즉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를 모 교회, 피 선교지역의 교회를 어린 교회로 규정하고 이들의 선교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선교 현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문화적 갈등, 혹은 비독교 타종교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선교지역에서의 서구 문화 제국주의적인 요인과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권위주의적 선교태도를 크게 비판한다.
한국교회가 주도한 여러 운동은 1912년에 윤치호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되지만 끊임없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으로 1918년에는 서울 YMCA회관에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창립총회를 개최되기에 이른다. 세계교회가 WMC이후 1924년에 IMC를 조직하고 개신교의 일치를 위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많은 세계의 교인들이 선교현장에서 결단하는 계기를 불러왔다. 이 긍정적인 여파는 한국에서 같은 해 10월 24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을 조직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