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묘청의 난
- 최초 등록일
- 2022.02.20
- 최종 저작일
- 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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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녕하세요. 오리양입니다.
역사학과 졸업생으로 예술학과 복수전공했습니다.
역사 및 예술 관련 레포트가 대부분입니다.
레포트 작성시, 퀼리티 높은 내용과 분량
그리고 참고문헌 표기에 공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1. 묘청의 난이란
2. 발생배경
3. 서경천도운동
4. 묘청의 난
본문내용
1. 묘청의 난이란
묘청의 난, 고려시대 인종 13년(1135년) 서경 출신 승려 묘청이 고려의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고 전개한 정치적 움직임과 그 이후 천도 운동이 좌절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저항한 이른바 난을 말한다.
2. 발생배경
묘청의 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묘청의 난이 발생하기 전, 배경이 되는 이자겸의 난 이자겸의 난 고려 인종(仁宗, 1122~1146) 4년인 1126년에 최고 권력자였던 이자겸 등이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될 것이라는 목자득국설(木子得國說)을 내세워 인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고자 일으킨 반란이다.
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1세기 중반 대내외적으로 안정되면서 고려의 지배체제가 자리 잡아갔다. 그러면서 지방에 근거지를 두는 호족들로부터 수도 개경 출신의 문벌귀족으로 지배층이 변화하였다. 그와 동시에 일부 가문들이 왕실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유력 가문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이자연(李子淵)- 이자의(李資義) 및 이자겸(李資謙) 계열의 인주 인씨(경원 이씨)를 비롯해 최충(崔冲)- 최사추(崔思諏) 계열의 해주 최씨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인주이씨는 문종(文宗)부터 선종(宣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등 숙종(肅宗)을 제외하고 대를 이어가면서 왕실과 혼인을 하여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묘청의 난의 배경이 되는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이자겸도 인주 이씨 집안 출신이다. 이자겸과 그의 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자겸은 그의 둘째 딸을 예종의 비로 만들고 예종 사후에는 외손인 어린 인종을 왕위로 오르게 한 공을 세우며 권력의 정점에 선다. 인종은 이자겸에게 공신의 칭호와 더불어 많은 혜택을 베푼다. 그러나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다시 인종의 비로 들여 왕비 가문의 명성을 지속하려 한다. 그는 다른 성에서 왕비가 나오면 권세가 나눠질까 걱정하여 인종에게 강청하여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게 하였다.
아마도 이자겸이 인종의 외할아버지라는 위치보다 장인으로서의 위치가 권력을 유지하기에 더 유리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하였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고려사』 권88, 열전 폐비 이씨.
『고려사』 권127, 열전 이자겸전.
훈요십조 中 5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