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에 대한 조선, 일본의 대응
- 최초 등록일
- 2021.08.22
- 최종 저작일
- 2020.10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아편전쟁에 대한 조선, 일본의 대응"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조선왕조의 아편전쟁 정보와 그 대응
Ⅲ. 일본막부의 아편전쟁 정보와 그 대응
Ⅳ. 상이한 대응의 배경 - 정보‧구조의 상황
Ⅴ.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19세기 중엽 동아시아 국가들은 내부의 모순과 밀려드는 외압으로 심각한 체제의 위기를 맞게 된다.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서양은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인명과 재산을 해치는 아편을 전파하면서 교역을 요구해요는 이적(夷狄)이었다. 이 중 가장 직접적인 위협은 군사적 위협이었다. 서양의 군사적 위협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는지의 여부가 삼국의 근대 전개 양상을 결정짓는데 큰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삼국은 자국에 가해지는 외압뿐 아니라 인접국에 대한 서양의 군사적 위협도 강 건너 불일 수는 없게 되었다.
제1차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국가가 서양에게 당한 첫 번째의 군사적 침략이었다. 청조가 당한 침략은 단순히 청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파급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아편전쟁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과 대응은 이 시기의 동아시아사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조선정부와 일본막부가 탐지한 제1차 아편전쟁 관련 정보를 전래된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정리하고, 각 정보의 입수 단계에서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였는가를 살펴보면서 조선과 일본을 상호 비교해보고자 한다.
Ⅱ. 조선왕조의 아편전쟁 정보와 그 대응
조선정부가 연행사절에게서 입수한 정보에서는 헌종 4년인 1838년 아편에 관한 문제부터 시작하여 청과 영국 간의 교전 사실이 사신의 정보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난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1845년까지 전쟁의 내용과 함께 아편에 관련한 정보가 들어온다.
아편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에 먼저 전래된 정보는 1832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온 김경선의 연행록에 전하고 있다. 김경선은 당보(塘報)에서 아편의 흡식(吸食)을 엄금해야 한다는 상주(上奏)를 읽었고, 청조는 근래 아편을 엄금하는 상유(上諭)가 자주 있었으나 그 효과가 없었으며 특히 광동과 복건 등지에서는 장병들의 흡연이 늘어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참고 자료
河政植, 「阿片戰爭과 朝鮮‧日本」, 『근대중국연구』, 중국근현대사학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