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와 라틴교회
- 최초 등록일
- 2021.05.20
- 최종 저작일
-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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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샤를마뉴와 라틴교회에 대한 요약정리 레포트 입니다.
목차
Ⅰ.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
1) 동맹의 성립과 성격
2) “로마인들의 보호자”와 “로마인들의 황제”의 의미
Ⅱ. 통치체제
1) 왕권 및 행정과 사법
2) 재정과 군대
3) 충성선서와 주종제도
Ⅲ. 카롤링 르네상스
1) 사회개혁 운동
2) 문화 부흥운동
본문내용
Ⅰ.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
1) 동맹의 성립과 성격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다 8세기 중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계기로 공식적인 동맹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탈리아 중부 및 북부에 일부의 통치를 위해 비잔틴 제국의 태수가 파견되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실질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한편 568년에 침입한 이래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상존해왔던 롬바드인들은 비록 이탈리아부터 비잔틴 세력을 구축함에 있어서는 교황권과 제휴하기도 했으나 비잔틴 세력이 세퇴하자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하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권은 프랑크 왕국에 접근하여 비잔틴 제국을 대신할 보호자를 얻고 지배권을 가진 비잔틴 제국과 롬바드인들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교황 측에서 먼저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시도되었다. 789년 롬바드인 왕 리우트프란드가 로마공국을 포위하자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샤를 마르텔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성 베드로 무던의 열쇠와 그의 쇠사슬의 고리들을 선물했다. 739년과 742년 사이에 롬바드인들이 공격을 했다는 보고가 없어 샤를 마르텔의 문제 개입 가능성은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샤를 마르텔 사후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부친의 궁재직을 형인 카를로만과 공동상속 받았던 피핀은 749년 말 또는 750년 초에 사절을 파견하여 프랑크인 왕의 직책의 지속적인 소유여부를 교황 자카리우스에게 물었다. 교황은 적절한 실권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프랑크 왕국의 수많은 귀족들은 자신들의 독립적인 위치를 위해 피핀 가문과 강력한 왕가의 출현을 원하지 않았고, 메로빙 왕조가 신에 의해 세워진 가문이라는 당시의 프랑크 사회의 통념이 그들의 입장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핀의 왕위 즉위에 대한 교황의 지지는 피핀의 반대세력들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벙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