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법과정치] 레포트 조선시대 성리학 통치에 대한 비판(조광조의 사상적 주장을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해당과목 A를 받은 자료입니다.
목차
1) 왕도정치를 논하다
2) 국경 지역 군대 파견을 반대하다
본문내용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문에서부터 저항권을 인정한다. 저항사상이 비단 오늘날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2000년 전에 권력의 근본을 백성에게서 찾은, 시대를 앞서간 성현, 맹자의 왕도사상이 대표적인 예다. 맹자가 말한 왕도사상이란, 임금이 인의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상적인 정치(至治)’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본디 유학에서 정치사상이 관여하는 것은 옛 성왕(聖王)의 도(道)를 계승하는 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도사상의 이상과 달리 폭군, 혹은 암군은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맹자는 이러한 행태를 가만히 보지 않았다. 임금이 왕도사상에 의해 정치를 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킬 정당성을 인정했다. 그 조건은 '현재의 천자가 포악무도하여 민심과 천명을 져버렸을 때, 새로운 천명을 받은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를 중시한 주자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에서는 실제로 두 번의 반정이 일어났다. 하나는 연산군의 패악적인 정치에 반기를 들고 발생한 중종반정이며,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북인(北人)들을 중앙정치에 넓게 포진 시킨 광해군을 부정하던 서인(西人)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이다. 민심과 별개로 단순 정치 투쟁으로 발생한 후자의 상황과 달리, 폭정으로 신하들은 충의를 잃었을 뿐 아니라 민심을 잃은 전자의 경우는 왕위찬탈의 충분한 당위성을 가졌다. 하지만 중종은 자력으로 ’새로운 천명‘을 받은 이가 아니었다.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새로운 천명의 결여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과 알력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사림과 훈구 간의 균형을 맞춰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조광조의 등장은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을 교조화해 가는 조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조광조가 등장한 때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16세기는 중종반정을 계기로 사림파 문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훈구파와 긴장관계를 형성했으며, 선조 재위 이후부터 본격적인 사림정치가 시작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시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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