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국가 형성 과정 및 삼국통일(동해안 진출과 영역 확장을 중심으로)』
도란찌
다운로드
장바구니
*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신라의 국가 형성 과정 및 삼국통일(동해안 진출과 영역 확장을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목차
1. 들어가며2. 상고기 대 신라의 동해안 진출
2-1. 금석문으로 본 신라의 동해안 진출
2-2. 고구려의 동해안 진출과 신라의 위기
3. 중고기 대 신라의 영역 확장
3-1. 고고학적 자료로 본 신라의 영동지역 진출
1) 강릉 초당동 유적
① 129-5번지 A-1호분
② 129-5번지 B-16호분
③ 84-2번지 A-1호분
④ 123-3번지 C-1호분
2) 강릉 병산동 유적
① 329번지 26호분
3) 동해 추암동 유적
① 181번지 가-21호분
3-2. 순수비로 본 진흥왕 대 영역 확장
4. 나가며
본문내용
신라와 동해안으로 대표되는 영동지역은 그 안에서 역사적으로 상호 물질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 역사에 대해 기술해놓은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경주 일대에서 발전한 신라가 점차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지금의 영남·영동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본 발제에서는 상고기와 중고기로 나누어 신라의 동해안 진출을 다룰 것이다. 상고기 대 신라사는 문헌사료를 기본으로 하지만 주변 소국의 복속에 대한 기록은 신빙성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러한 문헌사료의 결점은 금석학적 자료들로 보완할 수 있다. 또한 4~5세기경 고구려와 신라가 동해안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과정에서 신라의 문화가 강릉과 동해 일대에 전파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발견되는 당대의 유적·유물 등으로 증명되었다. 이후, 법흥왕(法興王) 대 제도 정비와 군사제도 개편을 토대로 진흥왕(眞興王) 대 활발한 정복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진흥왕이 정복지에 건립한 순수비(巡狩碑)를 통해 당시 신라의 국제적인 위세와 진흥왕의 지배 이념을 엿볼 수 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맹공이 전개되는 와중에도 신라는 정치적인 혼란과 외교적인 고립 상태를 타파하고 삼국통일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2. 상고기 대 신라의 동해안 진출
2-1. 금석문으로 본 신라의 동해안 진출
진한(辰韓) 12국 중의 하나였던 신라가 처음으로 동해안 주변의 소국들을 복속하기 시작한 때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대부터라고 본다.
“탈해이사금때에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 이 국경의 인근에 끼어 있어서 매우 심하게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몰래 병탄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많은 말들을 장토(張吐)의 들판에 모아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재미있게 놀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기(馬技)’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익숙히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전쟁을 일으켜 그곳을 갑작스럽게 쳐서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강봉룡, 「순수비에 담긴 진흥왕의 꿈과 야망」,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4.
강종훈,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56호, 한국고대사학회, 2009.
국립춘천박물관, 『권력의 상징, 冠-경주에서 강원까지』, 국립춘천박물관, 2008.
국립춘천박물관, 『흙에서 깨어난 강원의 신라 문화』, (주)통천문화사, 2013.
이상수, 「嶺東地方 新羅古墳에 대한 一考察 - 北坪地域 古墳郡』을 中心으로」, 『한국상고사학보』 18호, 한국상고사학회, 1995.
이성주 외 5명, 『江陵 草堂洞 古墳群 - 江陵 草堂洞 129-5番地 現代아파트 新築敷地 內 發掘調査 報告書』, 강릉원주대학교박물관, 2011.
이우태,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7권, 국사편찬위원회, 2003.
이우태, 「Ⅱ. 신라의 융성」, 『한국사』 7권, 국사편찬위원회, 2003.
이창현 외 2명, 『강릉 병산동 고분군 II - 강릉 병산동 329번지 자동차 정비시설 부지내 유적』, 강원문화재연구소, 2007.
임평섭, 「신라 지증왕대 동해안 지배와 우산국 정복」, 『역사와경계』 99호, 부산경남사학회, 2016.
전덕재, 「신라사의 새로운 열쇠, 냉수리비와 봉평비」,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4.
지현병, 「강릉 초당동 84-2번지 유적 발굴조사 개보」, 『신라사학보』 4호, 신라사학회, 2005.
지현병 외 2명, 『江陵 文化遺蹟 發掘調査 報告書(試掘 및 緊急 收拾調査)』, 강릉대학교박물관, 1996.
지현병 외 4명, 『강릉 초당동 유적 III - 강릉 초당동 84-2, 249-3, 394-1, 386-2, 278 주택신축부지 내 유적』, 강원문화재연구소, 2007.
최장열, 「중원고구려비, 선돌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4.
홍승우, 「4~6세기 신라의 동해안 지역 진출과 지방 지배방식」, 『4~6세기 영남 동해안 지역의 문화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