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기의 화엄사상(의상과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0.06.08
- 최종 저작일
-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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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일신라시기의 화엄사상(의상과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의상의 생애
3. 삼국통일 이후 사회․정치적 변화와 화엄사상의 도입 배경
4. 화엄사상
5. 화엄사상의 사회적 영향
6.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7세기 중반 삼국간의 항쟁이 신라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 삼국통일 과정에서 도움을 준 당(唐)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며 전쟁을 일으키자 신라는 당과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삼국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신라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화엄사상의 도입도 이러한 변화과정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본 발제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화엄사상을 도입한 의상, 그의 화엄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의상의 생애
의상은 625년 김 씨 가문의 한신(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43년을 전후하여 경주의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였다. 그는 출가한 후 원효(元曉)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 교리 탐구에 힘썼다. 650년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으로 가기 위해 육로로 떠났으나, 요동에서 신라의 첩자로 오해받아 위기를 겪은 끝에 당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구려 불교를 이끌던 보덕(普德) 7세기 고구려 불교를 이끌었으나,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그가 도교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자 이에 반발하여 백제로 망명해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에게 열반, 방등 등의 교리를 배우기도 했다.
661년 의상은 해로를 통해 당에 들어가는데 성공하는데, 이때 원효는 의상과 동행하던 도중 중간에 돌아갔기 때문에, 의상은 홀로 입당하였다. 이듬해인 662년에는 당시 종남산(終南山)에서 화엄교학을 이끌던 지엄(智儼) 의상, 법장의 스승으로 화엄종의 제2조(祖)이다. 자상대사 또는 윤화존자라고도 불리운다.
을 찾아갔는데, 당시 지엄 문하에 있던, 나중에 중국 화엄종을 완성하는 법장(法藏) 지엄의 제자로서 중국 화엄사상의 중심격인 인물이었다.
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고, 도선(道宣)과도 교류하였다. 668년에는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만들어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화엄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의상은 신라와 당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670년 신라로 귀국하여 조정에 당의 침공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의상의 귀국년도에 대해서는 670년 말고도 671년에 귀국했다는 주장이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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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삼,『의상 화엄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추만호,『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 실천, 1992.
카마타 시게오 저, 한형조 역,『화엄의 사상』, 고려원, 1987.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