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왕실의 근친혼
- 최초 등록일
- 2020.04.27
- 최종 저작일
-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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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 왕실의 근친혼』"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근친혼의 흐름
3. 근친혼의 긍정적 측면
4. 근친혼의 부정적 측면
5.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고려시대의 성문화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개방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개방적이라는 용어가 당시의 성에 대한 의식과 분위기를 모두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간결하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발표를 통하여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그들의 성 문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고려 왕실의 성문화는 전 왕조인 신라가 그러했듯, 그리고 이후의 조선이 그러했듯 왕은 여러 비빈을 둘 수 있었고 또 후손의 문제로 그렇게 해야 하는 문화였다. 따라서 왕실의 성문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계층보다 합법적으로 문란할 수 있었고, 이는 몇몇 왕들의 성벽과 어우러져 다양한 기행을 야기했다.
요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로 인해 화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하여도 고려 7대 왕인 목종이 유행간 이라는 자와 동성애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원 간섭기의 공민왕 역시 노국공주인 인덕왕후가 사망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적 증세를 나타내었다. 특히 원 간섭기의 충혜왕, 충렬왕 등은 문란한 성생활을 한 왕으로 유명하고 그들의 기행역시 다양하다. 이처럼 왕실의 성문화는 상당히 문란하였는데, 이런 성문화는 왕의 권위로 인하여 합법화 되었다. 하지만 왕실의 성문화가 문란하기만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왕은 원하는 여자를 가질 수 있었지만 혼인에 있어서 모두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혼인에 있어서 정치적 목적으로 인하여 압력을 받게 되었고 이런 환경으로 인하여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의 발표에서는 이 근친혼의 흐름과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 근친혼의 흐름
근친혼(近親婚)은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혼인형태이지만, 앞서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 건국 초가 되어서는, 골품제가 붕괴되고 근친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신라 하대에 들어서며 나타난 수많은 호족들은 스스로 성씨를 칭하거나 왕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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