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론 - 프랑스 부르주아사회의 성립과 발전-
- 최초 등록일
- 2019.12.30
- 최종 저작일
-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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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 혁명사론 - 프랑스 부르주아사회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부르주아사회의 성립(1789~1830) : 부르주아지의 권력획득
1) 앙상 레짐 : 부르주아지의 상승과 좌절
2) 대혁명과 제정 및 복고왕정 : 부르주아체제의 어려운 확립
(1) 대혁명의 발생과 부르주아지
(2) 부르주아체제의 수립
(3) 자코뱅적 경로를 통한 부르주아지의 승리
(4) 총재정부 및 통령정부 : 억압과 탈정치화
(5) 제1제정 : 부르주아제도의 확립
(6) 복고왕정 : 귀족과의 타협의 어려움
(7) 혁명과 제정 및 복고왕정기의 부르주아경제
(8) 나폴레옹 법전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2. 부르주아사회의 강화(1830~1880) : 대 부르주아지의 권력독점
1) 7월 혁명 : 대 부르주아지의 집권
2) 7월 왕정하의 부르주아경제
3) 7월 왕정의 사회정책과 이데올로기
4) 2월 혁명 : 중․소 부르주아지의 딜레마
5) 제2제정 : 대명사들의 지배
6) 제2제정과 부르주아 경제
3. 부르주아사회의 전환(1880~1914) : 중․소 부르주아지의 발흥
1) 지배부르주아지의 확대
2) 중․소 부르주아체제
3) 제3공화정의 경제
4) 제3공화국의 사회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앙상 레짐 : 부르주아지의 상승과 좌절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의 치세는 외관상 절대군주와 궁정귀족의 세력이 강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상업부르주아지가 크게 득세한 시기였다. 왕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던 재상 콜베르가 부르주아지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국왕참사회 구성원 및 각료의 다수도 부르주아지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부르주아지의 정치․사회적 상승은 점점 어려워졌다. 각료직뿐 아니라 주교직 및 군 장교직의 경우에도 귀족가문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점점 폐쇄되었다. 이러한 관직진출 제한에 대한 좌절은 18세기 부르주아지에게 혁명적 의식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2) 대혁명과 제정 및 복고왕정 : 부르주아체제의 어려운 확립
(1) 대혁명의 발생과 부르주아지
1789년 베르사이유에서 소집된 삼부회 제3신분 대표의 구성을 보면 법조계 종사자, 지주 및 자유직 종사자들이 대부분을 점한 반면 민중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또한 주목할만한 것은 이들 중 상인과 산업가 등 소위 자본가적 부르주아지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가하면 이들 중 다수가 절대왕정하의 관직보유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제3신분의 대표가 자본가적 부르주아지가 아닌 관료 및 전문직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비자본가 부르주아지가 대혁명기에 자본주의 발달에 유리한 제도적 변혁을 창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당시 법조계, 자유직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고객인 재정가, 금융가 그리고 대상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고 실제로 그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였던 사례도 발견되었다. 더군다나 혁명적 사건들의 전개로서 그것이 이들 비자본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광범한 개혁을 하도록 강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부르주아체제의 수립
1789년 8월 26일의 봉건제 폐지안은 부르주아지에게는 우선적으로 귀족특권의 소멸을 의미하였고..
<중 략>
참고 자료
퓌레 & 리셰, 『프랑스혁명사』(일월서각, 1992). 김응종 옮김.
모르네,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 (민음사)
로제 샤르띠에,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일월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