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의 역사와 인물 기말 인물정리
- 최초 등록일
- 2019.06.29
- 최종 저작일
-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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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김좌진
2. 이회영
3. 신채호
4. 김구
본문내용
키워드: 김종진, 억강부약, 김석범, 김복한, 노비해방, 호명학교, 신민회-국외독립운동기지건설(만주), 기호흥학회, 군자금모집(이창양행, 염직회사), 광복회-부사령(만주책임자)-대한독립선언서, 대한군정서-사관연성소-대한군정서군-백운평전투, 신민부-성동사관학교, 신민부군정파-한족총연합회-아나키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 하얼빈 일본 총 영사관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와 한산이씨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홍성일대에서 2천석 가량의 재산에 많은 노비를 거느린 명문가였다. 어린시절 공부보다는 활쏘기나 말타기 등 무술연마를 좋아했다. 유교경전보다는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 같은 병서를 즐겨 읽었다. 그는 15살 때 쯤 자신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하였다. 그는 노비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개화지식인들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은 안동김씨와 함께 홍성에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양의 신학문을 교육하여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기호흥학회 홍성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서울로 상경하여 신민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군사학과 전략을 배웠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서간도에 독립운동근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1909년 6월경 서간도 이주를 계획하고 국내에 연락거점을 설치하고 자금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서울에 이창양행,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했다. 여기서는 석유나 석찬을 판매했는데, 자금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연락기점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1910년 겨울부터는 전국의 부호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11년 5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을 투옥하게 되었다. 옥중에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있던 김구를 만났다. 1913년 9월 형기를 마치고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