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경제학사 논문 리뷰 허수열 이영훈 교수 논문 고찰.
- 최초 등록일
- 2019.06.16
- 최종 저작일
-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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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A. 논문저서의 주요내용과 이론 자료 소개
1. 조선시대 경제체제의 위기- 이영훈 교수 논문 이론 및 주요 내용
2. 1945년 해방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 허수열 교수 논문 이론 및 주요 내용
3.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요 주장의 실증적 검토- 허수열 교수논문 이론 및 주요 내용
B. 논문들에 대한 나의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1. 조선시대 경제체제의 위기- 이영훈 교수 논문 이론 및 주요 내용
조선시대 후기 단위토지당 지대량과 생산량이 큰폭으로 감소하였음을 알수있다. 이러한 감소의 배경에는 산림의 황폐라는 환경요인이 있었다. 인구의 증가와 압력으로 산림이 황폐화 되었고 이로인해 홍수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홍수는 농업 수리 시설을 무너뜨렸다. 정기시 역시 크게감소하였는데 남부지방의 연안부 중심으로 크크게 감소하였다. 남부지방의 조세미를 운송하는 권리를 서울상인이 독점하고, 일본과의 무역이 쇠퇴함에 따라, 서해와 남해를 무대로 한 원격지 상업이 쇠퇴 한것이 큰원인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조선왕조의 재정의 악화로 이뤄졌고, 왕조가 구축한 환곡이라는 대규보 분배체제 역시 19세기 중반까지 해체되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인플레이션을 야기 시켰으며, 결국 농민의 반란을 유발하여 왕조의 정치적 통합마져 해체 되었다.
18세기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자급적인 소농경제, 정기시를 중심으로 한 농민적 물류,포구,대장 간에 성립한 상인적 물류 결세 군포 환곡의 징수와 배분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물류라는 여러 경제형태의 복합적 구조로 성립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자급정 소농경제와 농민적 물류가 큰비중으로 자리잡았고, 지역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위해, 풍흉의 생산충격으로부터 경제 전체의 통합을 추구하는 상인적 물류와 국가적 물류가 성립하였다. 경제 전체의 통합 중심적역활을 담당했던것은, 상인적 물류보다 국가적 물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판도는 시장이 국가를 대신할수 밖에 없을 만큼 넓지않았다. 차 생사 도자기 등이 생산되지 않았기 떄문에 세계시장에서 격리되어있었고, 이 같은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과 국제전 환경이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를 국자적 물류를 중추로 한 국가적 재분유려제로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19세기 농업생산과 생활수준은 부농이 주도한 자본제적 량극분해의 방향이었는지, 아니면 소농이 주도한 집약화의 방향이었는지 견해차이가있었다. 어느쪽이든 농업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믿음에는 차이가 없었다.
참고 자료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
이영훈, 19세기 조선왕조 경제체제의 위기,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내용요약논문]
이영훈,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1996
이영훈, 허수열교수의 비판에 다시 답한다, 경제사학 제54호, 2013
허수열,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요 주장의 실증적 검토, 내일을 여는 역사 59, 2015 [내용요약논문]
허수열, 1945년 해방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2012 [내용요약논문]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05
뉴데일리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6827「식민지 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