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의 한계와 재평과 관련 글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
3. 기존 인식의 문제
1) 기존 사료의 한계
2) 왕건·궁예정권의 연속성 문제
4. 구비설화에서의 궁예와 재평가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9세기 이후 통일신라(統一新羅)는 골품제(骨品制)의 모순과 중앙정권의 약화, 그리고 지방 호족(豪族)의 난립이 발생하면서 점차적으로 국가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사회혼란을 틈타 등장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은 각자 옛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강역에서 전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목 하에 태봉(泰封)과 후백제(後百濟)라는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른바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후삼국시대의 승자는 궁예의 휘하로서 송악(松岳)을 기반으로 성장한 해양세력인 왕건(王建)의 몫이었다. 한때나마 후삼국을 호령하던 이들의 역사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세운 고려(高麗)의 등장과 함께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은 채, 역사 속에서 점차 그 자취를 잃어가게 되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태봉의 역사는 궁예의 폭정에 중점을 둔 채 왕조 교체의 당위성을 주는 쪽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그 결과 궁예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폭군이라는 이미지에 갇혀있기에 보다 객관적이고 정밀한 평가가 필요한 상태이다.
이렇듯 궁예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곧 역사가 승자의 입장을 대변할 뿐, 과거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궁예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와 같은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는 기존 사료대로의 해석을 지양하고,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궁예를 평가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을 중심으로 전승된 구비설화 등을 연구함으로써 궁예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최근 연구 성과들을 기반으로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과 그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궁예에 대한 나름의 역사적 재평가를 내려 보고자 한다.
2.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
궁예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선 그의 행적을 담은 사료를 확인하고 그 사료의 성격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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