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마리우스
- 최초 등록일
- 2019.05.11
- 최종 저작일
- 2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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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
1-1 초기생애
1-2 유구르타전쟁과 집정관의 시작
1-3 게르만족의 침입
1-4 마리우스의 쇠퇴
1-5 마리우스의 재기
1-6 마리우스의 최후
2. 업적
2-1 마리우스의 군사개혁
3. 평가
본문내용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멀지않은 이탈리아 반도 내륙 아르피눔에서 기원전 157년에 태어났다. 마리우스가 사람들은 몇백 년 동안 대대로 아르피눔에서 살았으며 라틴족의 핏줄이라는 자존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마리우스가 사람들도 그 누구도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곳 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이 부여된 것은 기원전 188년으로 마리우스가 태어나기 31년 전 이었다. 그 당시 부유한 로마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청년이 된 마리우스는 17세에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능을 발휘해 크게 주목을 받았다. 마리우스는 23세 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개인 참모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스페인의 누만티아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는 이 전쟁으로 크게 주목을 받게 된 시작이었다. 그 후 2년 뒤인 기원전 132년에 그는 아이밀리아누스를 따라 로마로 개선했다. 그는 군대에서 출세를 원했고 로마에서 군대를 지휘하려면 법무간 이상의 공직에 올라야만 했다. 마리우스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통해 기원전 119년, 그의 나이 38세로 비교적 늦게 호민관이 되었다. 마리우스가 호민관이 되는 것을 도와준 사람은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로 명문귀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마리우스가 호민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이유인 즉 마리우스를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부려먹을 생각이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메텔루스 가문이 평민회의 입법권한을 축소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려했지만 마리우스가 이를 반대했다. 이때부터 메텔루스 가문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후로 마리우스가 공직에 오르기 위해 입후보하면 메텔루스 가문 사람들은 그를 모욕하고 비난하며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원전 115년 법무관을 역임한 뒤 스페인의 총독으로 파견됐다. 그는 그 곳에서 군사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귀국했을 때 큰 부자가 되었다.
참고 자료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저자: 허승일 출판사: 길
로마전쟁 영웅사. 지은이: 아드리안 골즈워디 옮김이: 강유리 출판사: 말글빛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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