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
- 최초 등록일
- 2018.11.16
- 최종 저작일
-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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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생애와 사상 형성
Ⅲ. 무저항 비폭력 사상
Ⅳ. 맺음말
본문내용
그 이름은 한국근현대사에서 독립, 혹은 민족운동가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는 일제의 침략에 의해 순절하거나, 의병이 되어 투쟁하지도 않았고,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이 되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한 인물도 아니지만, 식민지의 한국사회 속에서 해학을 잃지 않으며 일생을 민족을 위해 바쳤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이 치러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이 글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며, 또 어떻게 민족을 위하여 노력하였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생애와 사상의 형성
월남은 조선왕조가 기울어져 가는 때에 태어나, 조선의 개화를 지켜보기도 하였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에는,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기독교에 입교하는 것이 그의 일생의 최대의 분기점 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 일련의 내용을 입교 전과 후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기독교 입교 전의 생애와 사상
이상재의 휘는 상재(商在), 자는 계호(季皓)이며, 호는 월남(月南)
이다. 1850년 11월 21일 충청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리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말 충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6대 손이기도 하다. 1864년엔 강릉 유씨와 결혼하였으며 1867년엔 과거를 응시하나 낙방거자가 되고 말지만, 친척의 도움으로 죽천(竹泉) 박정양(朴定陽)의 개인비서로 일하게 된다.
그 뒤 1881년 죽천과 함께 신사유람단으로서 일본의 개화 문물들을 접하게 된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이던 홍영식(洪英植)과의 연으로 우정총국 인천국 주사의 관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홍영식의 사후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한다.
1887년엔 한미수교를 성사시키기 위한 사신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월남은 죽천과 함께 근대 교육제도 개혁을 주도하며 실업(實業)을 학문적 위치로 부각 시키는 공헌을 한다. 그 후 1896년엔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 협회를 창립하고 만민 공동회를 열어 계몽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된다.
참고 자료
이현희. (2007). 월남 이상재와 한국의 민족운동. 문명연지, 8(1), 217-258.
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삶과 한마음 정신』(조선일보사,2000)
유준기.(2006).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항일 민족독립운동. 한국보훈논총, 5(2)
김권정.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민족운동." 숭실사학 24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