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튀르크
- 최초 등록일
- 2018.02.14
- 최종 저작일
- 2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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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살로니카의 혁명파들이 고위 정책을 논의하는 사이 야전군 인사들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1908년 6월 세라즈(현재 마케도니아의 세라이)에서 한 장교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계기로 술탄의 정보원들에 의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만일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효화될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행동을 취한 인물은 레스네에 주둔하고 있던 알바니아계의 니야지 대위였다. 그는 1908년 7월 3일 헌법 부활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200명의 병력과 민간인 지지자들을 이끌고 병영을 이탈했다. 술탄 측은 지역사령관 셈시 파샤로 하여금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으나 셈시 파샤는 7월 7일 CUP 멤버인 아티프에게 암살당한다. CUP는 7월 22일, 만일 술탄이 헌법을 부활시키지 않는다면 제국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 날인 7월 23일, 니야지와 다른 한 명의 CUP 멤버인 에윕 사브리 대위가 마나스트르로 들어가 흐프즈 파샤 총독의 집을 포위한 데 이어 육군 사령관인 오스만 파샤를 납치했다. 같은 날 엔웨르 파샤는 쾨프륄뤼에서 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마케도니아 전역에서 혁명파 장교들의 주도로 똑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술탄은 결국 7월 24일 헌법을 부활시킨다는 법령을 반포하고 하원 의원을 선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엔웨르는 술탄의 헌법 부활 선언이 있던 날 가장 먼저 살로니카로 돌아와 ‘자유의 챔피언’으로 칭송받았다. 그 보다 먼저 헌법 부활을 선언했던 니야지나 에브리 사윕은 정치적인 야망이 없었으므로 엔웨르 파샤는 단연 CUP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CUP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어려운 외부 상황과 맞딱뜨려야 했다. 오스만 의회 하원 선거가 진행 중이던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베를린 회의(1878) 이후 관리해오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병합한 것이다. 이어 1885년 베를린 회의 직후 동부 루멜리를 합병하며 영토를 넓히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의 공국이던 불가리아도 독립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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