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공민왕
- 최초 등록일
- 2014.11.28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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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즉위 이전의 상황
Ⅲ. 공민왕의 초기 국정운영
Ⅳ. 공민왕의 후기 국정운영
Ⅴ. 맺음말
본문내용
고려 제 31대 공민왕은 고려 말기의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개혁정치를 단행한 왕으로 고려 역대 왕 중 대다수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왕으로 꼽힌다. 공민왕은 선대왕들과 달리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승려였던 신돈을 등용하는 등 다양하면서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를 펼쳐나갔다. 이러한 공민왕을 통하여 고려 말에 어떠한 변화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변화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중 략>
공민왕이 왕으로 즉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고려의 왕권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미약했고 국정 또한 많이 어지럽던 시기였다. 무신란 이후 고려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변화하여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되었고 그 이후는 원나라의 영향력으로 좌지우지되던 때였다. 때문에 고려는 정치적 독립성을 거의 상실하였고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에 의해 임명되고 또 폐위되었다.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공민왕은 강릉대군으로 봉해졌고 전례대로 12세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원나라의 볼모로 잡혀가 원나라에서 숙위생활을 하였다.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주 바뀌었으며 그 와중에 공민왕은 왕위 계승에 두 번이나 실패를 겪었다. 대원자라고 불리며 왕위계승 후보자로 일찍이 주목받았지만 형인 충혜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충목왕이 왕위에 올랐고 그 후에 또 다시 공민왕은 조카에게 왕위계승에서 밀리게 되었다.
<중 략>
고려 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개혁을 단행한 공민왕은 초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개혁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 왕후였던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면서 공민왕의 정치행보는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후기 평가에 따르면 선대왕들의 혼인생활과는 다르게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이는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공민왕이 후궁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으며 늦은 나이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변화가 없던 것으로 보아 왕과 왕후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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