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제도
- 최초 등록일
- 2014.07.03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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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한국 성씨의 유래
2장 우리 성씨의 현황
3장 외국의 성씨제도 (두산백과중 외국의 성씨제도 인용)
본문내용
1장 : 한국 성씨의 유래
한국에서 성씨(姓氏)는 고대 국가의 형성기부터 나타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 하면서 성을 고씨(高氏)라 하고, 동시에 신하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默居)에게 소실씨(小室氏)의 성(姓)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백제는 온조(溫祚)가 성(姓)을 부여(扶餘)라 하였다. 신라(新羅)에는 박(朴)·석(昔)·김(金) 3성(姓)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에는 6부(部)에 사성(賜姓)하여, 양부(梁部)에 이씨(李氏), 사량부(沙梁部)에 최씨(崔氏), 점량부(漸梁部)에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에 정씨(鄭氏), 한지부(漢祗部)에 배씨(裵氏), 습비부(習比部)에 설씨(薛氏)의 성(姓)을 주었다고 한다. 가야국(伽倻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황금알에서 태어나 김(金)씨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들은 한국에서 고대 부족사회 때부터 성씨(姓氏)를 사용했음을 알려주지만, 중국 문화의 유입이 본격화하면서 성씨(姓氏)의 사용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는 건국 초기인 1세기 무렵부터,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 신라는 6세기 진흥왕(眞興王) 때부터 성씨(姓氏)의 사용이 본격화하였다고 보여진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왕실의 성(姓)을 그대로 따라 썼는데, 고구려에는 고씨(高氏), 백제는 여시(餘氏), 신라에는 김씨(金氏)를 쓴 사람이 많았고, 다른 성씨(姓氏)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성으로는 을(乙)·예(禮)·송(松)·우(優)·우(于)·주(周)·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의 20여 가지, 백제는 진(眞)·해(解)·사(沙)·연(燕)·백(苩)·국(國)·목(木)·협(劦) 등 8족(族)을 비롯하여 부여·사마(司馬)·수미(首彌)·고이(古爾)·재증(再曾)·흑치(黑齒) 등 20여 가지,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을 비롯하여 6부의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과 장(張) 등 10여 가지의 성씨(姓氏)가 전해진다. 이러한 성씨(姓氏)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하였고,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에서는 모두 성씨의 사용이 보인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김지량(金志良)·최치원(崔致遠)·박계업(朴季業)·장보고(張保皐) 등이 좋은 예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