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까라마 조프가의 형재들에 수록된 대심문관 이야기에 대한
소논문입니다.
서평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이야기에 대한 간약한 소개 후 시작합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완성 작품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중 5권 찬반론 중에서도 5 번째에 있는 대심문관 이야기(서사시) 를 주제로 무신론자라고 볼 수 있는 이반과 신실한 수도사라 부를 수 있는 알료사가 대화하는 장면이다.(물론 이반과 알료사의 대화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대심문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대심문관 이야기를 대충 말해보다면 이야기 속 에서는 예수가 재림한다, 그러자 재림한 예수를 본 대심문관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인간은 반역자로 창조되었다, 또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경배(예배)하려는 본성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3가지 시험, 아니 신이 우리를 창조했으며 사랑하는 것 , 독생자를 내려 보낸 것 아니 예수 당신이 내려와서 이곳에 재림하는 것부터가 모순이라 할 수 있으며. 사람은 당신의 예상보다 더 나약하고 사악한 존재이다 거기다 당신은 자유라고 불리는 선물이라는 이름의 저주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우리를 방해하지 마라, 그냥 둬라 참견하지 말고 떠나라 라고, 그 대심문관에게 예수는 기독교의 진리이자 최고의 아이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는 입맞춤으로 화답하고, 대심문관은 알면서도 반항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중 략>
사람들이 신랄하게 말하며 논쟁을 지껄일 수 있는 호박씨거리 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신학도 라면 적어도 이 책을 한번 즘은 읽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다.
결국 대심문관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입맞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라는 아이러니로 끝맺음 한다,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본질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기적, 신비, 교권조차도 사람에게 자유로서 맡겨 두었다, 그것이 믿음인 것이다, 확신, 확인과 믿음은 엄연히 다르다, 사랑하지 않는 것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비판도, 질투도, 논쟁도, 그 어떤 논란조차도 있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것이 변하기에 논란이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열심을 다해 사랑함을 추구 할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일 것이다.
참고 자료
A. W Tozer, Tozer on worship and entertainment(Wisdom Garden Books 2006.06.30 ), 이용복 역, 『예배인가 쇼인가』 (규장: 서울, 2004)
Spinoza, Baruch De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Netherlands :1662)
J. Lienhard, "Luther an Bennings of the Reformation, Jill Rairr ed, Christian Spirituality: High Middle Ages and Reformation, SCM Press, (1988), 268-299
손호연, 『아름다움과 악 (제 1권 신학적 미학 서설)』(서울: 한들출판사, 2009)
손호연, 『아름다움과 악 (제 4권 헤겔의 미학과 신정론)』(서울: 한들출판사, 2009)
Daniel 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Eerdmans Pub Co, 2004); 신옥수, 백충현 역,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Georges Casalis, Luther et l'Eglise confessante (Paris : Éditions du Seuil, 1962)
이오갑 역, 『루터와 고백교회』(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