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최초 등록일
- 2013.05.21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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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경천도론
2. 도선의 후계자 묘청
3.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
4. 개경파의 역공
5. 묘청의 반란
6. 맺음말
본문내용
- 서경천도론의 등장
이자겸과 척준경의 변란으로 왕권이 뿌리째 흔들리고 사회 기강마저 무너지는 등 고려는 인종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북방에서는 요가 멸망하고 북송이 몰락하는 가운데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이 발흥하고 있었다. 금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다시 한 번 파란을 예고하게 되고 이러한 대내외적 혼란속에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에 의해 ‘한국 역사상 천년 이래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받았던 묘청의 난과 서경천도론이 대두하였다.
인종대에 와서 이자겸난의 시련을 겪고, 아울러 복잡한 대외관계의 중압감에 시달리며 20세의 성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이자겸난으로 스산해진 개경(開京)을 벗어나고 싶었던 만큼, 무겁게 긴장을 자아내는 국제관계의 틀도 깨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10여 년 만에 상하가 뒤바뀐 고려와 금과의 관계가 불만스러웠지만, 또한 해로를 통해 고려를 거쳐 금과 교섭하여 포로가 된 두 황제를 귀환시키려는 남송의 집요한 접근도 인종으로서는 참기 어려웠다.
<중 략>
고려 인종대는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문벌귀족이 득세하여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금이 건국하여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대회관계에 있어서 금의 대두와 고려에의 압력은 예종대만 하더라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이 고려에 군신의 예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겪은 후 자주성의 확보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경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묘청이 등장하였다. 묘청 등 서경파는 구태연한 문벌귀족의 사회에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며 국력을 강화시켜 금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우선 개혁을 위해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세력근거지인 서경천도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인종도 왕권강화를 꿈꾸고 있었으므로 쉽사리 서경파의 견해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정성희, 2007, 『고려왕조사 이야기』, 청아출판사
남인국, 1999, 『고려중기 정치세력연구』, 신서원
이정신, 2004,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경인문화사
민현구, 2004, 『고려정치사론』, 고려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