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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10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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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개항의 전개
1. 쇄국의 위기
2. 운요호사건과 개항
Ⅲ. 개항의 배경
Ⅳ. 개항과 일본
1. 도쿠가와 막부
2. 미국의 진출 동기
1) 미국
2) 망하조약(望廈條約, 1844년)
Ⅴ. 개항과 메이지유신
Ⅵ. 개항과 강화도조약
Ⅶ. 개항과 척화
Ⅷ. 개항과 운요호사건
개항과 민씨 정권
본문내용
Ⅰ. 개요
당시의 관찰자들에게 일본이 처한 상황은 중국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것처럼 보였다. 당시 일본은 260개의 독립적인 봉건 정권들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고 권위와 권력이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던 쇼군에 의해서 단지 통합되어 있었다. 때문에 중앙 집권적이며 완전하게 관료적인 중국보다 정치적으로 더 후진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을 취할 능력이 더 적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의 봉건적 계급 사회는 보다 더 근대화된 서양 국가들의 도전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전산업화 단계의 경제는 유럽의 기계생산에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일본은 방대한 중국 제국이 가지고 있던 거대한 대륙적 견고성을 갖지 못하였고, 작은 섬들은 서양의 해상 세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서양의 도전에 더 빠른 속도로 그리고 훨씬 더 성공적으로 대응하였다. 어떤 전쟁도 치르지 않았고 어떤 밀무역도 발전하지 않았으며 어떤 영토도 빼앗기지 않았다. 혼란이 존재했으나 그것으로부터 곧 그 치하에서 일본인들이 근대적 세력이 되는 것으로 급속도로 나아갔던 근본적으로 변화된 정치 체제가 등장하였다. 비록 일본이 그들 고급문화의 대부분을 중국으로부터 획득하였지만 명백하게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서양의 도전에 아주 다르게 대응할 수 있는 나라였다.
< 중 략 >
Ⅸ. 개항과 민씨 정권
대원군은 농민의 저항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지배층 안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도 실패하였는데, 특히 서원 철폐로 인한 양반 유생들의 상소는 대원군을 몰락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민씨 세력이 권력을 틀어쥐고 철폐되었던 서원도 다시 복구되었으나,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하고 농민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권력 유지에만 눈이 먼 민씨 일족은, 개항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불평등한 ‘조일 수호 조규’를 맺기에 이르렀다. 1873년 무렵부터 조선 침략에 나선 일본은, 1875년 미국에서 사들인 갖가지 무기로 무장한 운요 호를 비롯한 군함을 끌고 와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함포 사격을 하며 위협하였다. 민씨 정권은 일본의 무력 위협에 굴복하여 침략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마침내 ‘조일 수호 조규와 그 부속 협정’에 의해 인천, 부산, 원산에 개항장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일본은 개항장에서 조선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장사를 할 수 있었으며, 수출입 상품에 대해 관세를 면제받았고, 일본 화폐를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조선의 재부를 약탈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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