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을 통해 본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역사적 방향
- 최초 등록일
- 2013.01.10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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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연대별로 일어난 학생운동을 설명하고 그 학생운동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방향과 역사적인 사실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목차
1. 4.19혁명
2. 5.16 직전의 학생운동
3. 5.16 이후의 학생운동
4. 5.18 민주항쟁과 1980년대의 학생운동
5. 학생운동의 의미
6.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역사적 방향
본문내용
4.19 혁명
1960년 마산에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한 김주열 군이 최루탄을 맞아 마산 앞 바다에서 시체로 떠올랐다. 시신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고 일부러 바다에 던진 정황이 나타나자 이에 분개한 마산 시민의 거센 항쟁에 이어 전국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4.19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정권은 이승만 체제였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0년 4선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윌리엄 왓츠 당시 미대사관도 이승만은 전제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승만은 85세였고 고령이어서 재임 기간을 다 채울지도 모르는 상황에다가 이미 야당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욕심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무리한 방법의 선거 전략을 내세워 76%의 득표로 이기붕을 당선시켰다. 여론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부정선거의 증거가 폭로되면서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자 이를 시발점으로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계엄령의 선포로 군대가 출동하였지만 이미 4월 25일 대학교수단이 "피에 값에 보답하라" 며 학생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높은 나이로 국민 대중과 직접 소통이 별로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에 가서야 유혈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게 된 그는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위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는 또한 병원을 직접 찾아가 학생들을 찾아가 위로하기도 했다. 결국 4월 27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경무대에 피신해 있던 이기붕 가족이 자살하고 자유당 정권의 핵심세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자유당 정부의 외무부장관이었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이 형성되었고 1690년 7월 29일에 제 5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8월 23일 국회는 윤보선을 제 5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