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나름대로 열심히 쓴다고 썼는데..많은 도움 됐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수당귀족의 지위
Ⅲ. 귀족의 관료로의 유도
Ⅳ. 신흥관료의 대두
Ⅴ. 결 론
본문내용
8세기에서 11세기에는 이르는 기간은, 비록 이 시기의 사회적 변동에 대한 해석이 이 시대를 다룬 저술만큼이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고도 급속한 사회적 변동기였다는 점에서 모든 중국 역사가간에 이견이 없다. 혹자는 그러한 사회적 변동을 중국 역사상‘근대’로의 이행기로 보기도 하고, 혹자는 자본주의와 도시화의 태동으로 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노예제에 근간을 둔 사회에서‘봉건제’로의 이행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제적인 역사문제라기보다는 신념의 논제로서 다루어져 왔던 시대구분이라는 거창한 문제를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회변동의 일면 곧 중국 지배계급의 구조와 구성상에 나타난 급격한 변화로서, 이것은 후반기 중국사의 전개와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며, 특히 당대 지배층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수와 당이 또다시 전중국을 재통일하였을 때, 새로운 왕조는 기존의 사회적 제도가 정치적 안정과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부적당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수와 당은 새로이 창설된 과거제도를 통하여 직업적 관료를 등용하였으며, 구귀족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계층에서 선발된 이들은 개인적 재능을 인정받은 자들이었다. 구귀족과는 달리 이 새로운 관료들은 자기들의 사회적 집단이 아닌 관작을 내려 준 국가에 기본적으로 충성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많은 반향을 가져왔다. 새 제도가 사회적 계층이동 가능성의 기회를 크게 증가시키게 되면서―적어도 교육받은 엘리트에 대해서는―동시에 송대 이래 황제는 재상들과 비교적 손쉽게 친해질 수는 없었다. 황제는 정치적 권위의 유일한 근원으로, 통치 지배를 통하여 관료계의 전 관료에 대하여 독단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제왕의 권력이 점차 관료화되고 전제화되어 가면서, 재상 및 대관과의 개인적 관계가 차단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황제는 매일 공표되는 국사 논의를 그의 측근 비서나 환관에 그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것이었다. 당말까지 구귀족은 비교적 강력한 세력으로 잔존하였으며 세습적인 특권을 보지하는 한편, 전적으로 교육과 문학적 재능에 의하여 관료로 등용되는 원칙도 결코 도전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참고 자료
《참고 문헌》
◎민두기 편,『중국사시대구분론』,창작과 비평사, 1984
◎A.라이트, D.트위체트 엮음, 위진수당사학회 옮김,『당대사의 조명』, 아 르케, 1999
◎이계명 저,『수당관료제의 성립과 전개-산동귀족과 산동관료를 중심으 로』, 전남대학교 출판부, 1995
◎전영섭 저, 『중국 중세 신분제 연구』, 신서원, 2001
◎궁기시정 저, 임대희·신성곤·전영섭 옮김,『구품관인법의 연구』,소나 무, 2002
《참고 논문》
◎유원적,「당 전기의 지배층」,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편,『강좌 중국 사Ⅱ-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지식산업사, 1989
◎박한제,「위진남조 귀족제의 전개와 그 성격」,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 실 편,『강좌 중국사Ⅱ-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지식산업사, 1989
◎차대웅,「중국의 과거제도 성립 연원에 대한 고찰」, 조선대학교 석사학 위논문, 1984
◎유원적,「당대 전기에 있어서 관료제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관료층기반의 확대와 무. 후조의 남관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부, 1977
◎전영섭,「당대 양인의 신분질서 구조와 기능-율령에 보이는 용례를 중심 으로」,『법사학연구』17, 1996
◎유원적,「당 무·위후조의 남관에대하여」,『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 총』,1990
◎유원적,「당조 지배층의 성격에 대한 학설사적 검토」『이화사학연구』 11.12, 1981
◎김명희,「당초 귀족에 대한 연구 : 산동귀족의 관료화를 중심으로」,성균 관대학교 석사학위론문,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