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지리산빨치산형성과 전개
- 최초 등록일
- 2011.05.20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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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리산과 지리산빨치산형성과 전개입니다.
목차
1. 지리산 개관
2. 지리산 노고단
3. 빨치산의 용어
4. 해방 이후 빨치산의 형성
5.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 빨치산의 전개
6. 지리산 빨치산의 궤멸 원인
1) 대한민국의 토벌 의지
2) 미국의 토벌 지원
3) 남조선노동당의 몰락
4) 자연조건
5) 전향자의 토벌대 보조
7. 맺음말
부록 : 대한민국과 빨치산 부대 연표
본문내용
1. 지리산 개관
함양군
남원시
구례군
진주시
지리산은 두류산 또는 방장산이라고도 불린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롭게 된다고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하였으며, 백두대간의 주맥이 한반도를 타고 이곳까지 이어졌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도교의 삼신산 가운데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지리산은 험준한 산세를 이루는 가운데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에 걸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산의 서쪽에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휘돌아 남원에서 남해로 나가고, 동쪽으로는 남강과 경호강이 휘어져 함양에서 진주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지리산을 둘러싼 이들 강은 동서 교통 및 문화교류의 활로가 되었다. 우리가 지리산을 이야기할 때 섬진강과 남강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 강이 사람과 물산의 통로였다면, 지리산의 웅혼한 품은 사상과 기백을 키워간 터전이었다.
지리산은 고유신앙인 성모신앙과 산신신앙을 잉태한 산이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의 산이었으며, 고유의 신선사상을 낳은 산이었다. 고대 불교가 수용되면서 이들 고유신앙과 웅화하며 지리산은 불교사상을 꽃 피워 나갔다. 8세기경 화엄도량인 화엄사가 자리잡은 뒤에 9세기에는 교종불교의 바탕 위에서 선종불교의 실상산문과 동리산문이 일어났으며, 12세기 전후에는 고려불교의 정수인 천태종과 조계종이 모두 지리산에서 생겨났다. 지리산은 교종불교와 선종불교가 융합한 산실이었으며, 고려시대 불교사상이 혁신하는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김영택, 「한국전쟁기 남한 내 적색 빨치산의 재건과 소멸」,『한국근현대사학회보』제 27 집, 2003
<연구서>
- 권순목, 『지리산 이천년』, 서울, 보고사, 2010
-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지리산문화권-우리역사의 문화를 찾아서』, 서울, 역사공간, 2004
-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 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서울, 휴머니스트, 2010.6
- 한국정치연구회, 『키워드로 읽는 한국현대사 1 - 8.15해방에서 4.19혁명까지』, 서울, 이매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