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교육발전에 공헌한 여성 - 신여성의 대명사 `하란사(河蘭史)`
- 최초 등록일
- 2010.12.25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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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성교육발전에 공헌한 하란사의 출생, 성장, 시련, 여성교육의 공헌점, 비판, 종합 순서로 그녀의 일대기 및 업적 조사를 하였습니다.
목차
신여성의 대명사, 하란사(河蘭史)
시작하며)
하란사라는 여성, 이화학당에 입학하다)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 첫 여학사가 되다)
교사로써 활약하다)
신여성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다)
하란사, 한국 여성들을 일깨우다)
독살로 일생을 마감한 하란사)
끝을내며)
본문내용
교사로써 활약하다)
하란사는 귀국 후 1906년 11월에 시작된 상동교회 안의 영어학교 교사직을 맡아 이화학당의 창시자인 스크랜톤 부인(M.F.Scranton)을 도와 영어와 성경 등을 가르치며 불우한 환경의 여인들을 깨우쳐나가기 시작했다.
1908년 앨벗슨(M.M.Albertson)이 이 학교 교사로 들어오면서 하란사는 앨벗슨과 함께 이 학교를 단순한 영어학교를 넘어서 성경학교로 전환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후에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되었다가 남자 협성 신학교와 합동하여 오늘의 감리교 신학대학이 되었다. 초창기 한국 감리교회의 여성 지도자인 양우로덕, 신알베르트, 손메레 등이 모두 하란사에게서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
1910년 9월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자 그는 이 대학과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오늘의 교감에 비유할 수 있는 총교사가 되었고 이화학당 기숙사 사감의 책임도 맡았다. 이화학당 학장이된 프라이가 "하부인은 일을 함에 있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이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가서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며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정도로 그녀는 자기 일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