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담판외교-펜은칼보다 강하다
- 최초 등록일
- 2010.12.03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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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외교에관한 짧은 정리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서
남북 관계, 일본과의 독도문제 등 국제간의 외교마찰이 커지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 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듯, 서희와 관련된 책들은 출판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계속 재판되고 있다. 오랫동안 서희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 고려군의 군사력 우세에 대한 자신감,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배짱을 가지고 ‘실리’와 ‘명분’ 두 가지 모두를 획득한 ‘위대한 외교가’이기 때문이다. 서희는 고려를 침입한 80만 대군의 거란군을 적장과의 외교담판을 통해 물리친 인물이다.
본
거란의 침입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었으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단교를 선언하여 거란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태조 25년(942) 10월 거란에서 사신으로 보낸 사신 30명과 예물 낙타 50마리가 고려 땅에서 죽었고, 40여년 뒤 성종 5년(986)에 거란은 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성종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거란을 고립시키는 고려의 북방정책은 거란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화친 제의를 고려가 거절하자 거란의 고려정벌 의지는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성종 12년(993)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 왔다.
당시 나온 대책은 두 가지였다. 우선 중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도록 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영토를 거란에 떼어 주고 황주로부터 절령에 이르는 선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할지론 이었다. 논의 끝에 국왕은 할지론을 택하기로 하고, 거란군이 서경을 장악할 것에 대비해 곡식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는 것은 대동강에 버리기로 하였다. 이때 서희가 이 굴욕적인 강화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으며, 민관어사 이지백도 서희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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