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논쟁으로써 아리우스논쟁과 니케아종교회의
- 최초 등록일
- 2010.10.15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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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쟁에 대한 소 논고이다.
교회사과제로 작성한 것인데 310년부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의 과정까지 기독론 논쟁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초기 아리우스 논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삼위일체 논쟁으로써 아리우스논쟁
3. 나가는 말
본문내용
테오도시우스황제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 감독회의를 소집하여 신학논쟁을 하였을 때는 갑바도키아 교부들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모인 감독들은 새로운 신조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아리우스주의는 그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다 정죄하였다. 그리고 공의회는 나지안주스의그레고리우스의 주도하에 성령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신조를 채택하였다:“우리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영광을 받으시게 되어 있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 주(主),생명을 주시는 이를 믿는다.”
콘스탄티노플회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아리우스주의는 신학논쟁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3. 나가는 말
아리우스 논쟁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신적인 지위”에 관한 논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는 성자의 신성에 관한 니케아 회의의 신조를 다시 확인 하였으며 성령의 신성에 관해서도 동일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연히 선포되었다. 아리우스 논쟁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삼위일체 논쟁은 필연적으로 기독론 논쟁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아리우스논쟁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또한 기독교를 헬라문화에로 반영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조리라고 볼 수 있는 논쟁의 과정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정치권력에 의하여 신학의 진리들이 결정되는 과정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교도인 쥴리안에게서 신학적결정의 자유를 얻는 과정을 볼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과정이 삼위일체 신론의 교리를 튼튼히 세우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리차드 루벤슈타인이 쓴『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라는 문헌을 보면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목욕탕에서도, 동네 수퍼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한 시대의 결과물들을 놓고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않되겠구나” 하는 교훈을 얻게 된다. 교회사를 통하여 아니 교회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 깊은 영적교제들을 가능케 하는 그 엄청난 학자들의 수고와 그 연구 성과들에 새삼 경의를 갖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