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조선전
- 최초 등록일
- 2010.09.23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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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사 조선열전] 열전 208
□ 洪武五年[1372, 고려 공민왕 21년]表請遣子弟入太學,帝曰:「入學固美事,但涉海遠,不欲者勿強。」貢使洪師範、鄭夢周等一百五十餘人來京,失風溺死者三十九人,師範與焉。帝憫之,遣元樞密使延安答里往諭入貢毋數。而顓復遣其門下贊成事姜仁裕來貢馬,其賀正旦使金湑等已先至,帝悉遣還。謂中書省臣曰:「高麗貢獻繁數,既困敝其民,而涉海復虞覆溺。宜遵古諸侯之禮,三年一聘。貢物惟所產,毋過侈。其明諭朕意。」
[홍무] 5년(A.D.1372; 고려 공민왕 21) 에 자제들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황제가 말하기를,
“입학하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다만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와야 하니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강제로 보내지 마시오.”[註061]
라고 하였다.
공사[주062] 홍사범[주063]·정몽주[註064] 등 150여명[註065]이 경사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39명이었는데, 그 중에 사범도 끼여 있었다.[註066] 황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원나라의 추밀사[註067]였던 연안답리[註068]를 보내어 자주 입공하지 말도록 유고하였다.[註069] 그러나 전이 문하찬성사[註070] 강인유[註071]를 다시 보내와 말을 바쳤고,[註072] 하정단사[註073] 금서[註074] 등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註075] 황제는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면서[註076] 중서성의 신료에게 말하기를, “고려에서 공물을 보내는 일이 너무 잦기 때문에 그 인민이 피폐하여지고, 바다를 건너오므로 난파와 익사를 걱정하게 된다. 마땅히 옛 제후의 례를 따라 3년마다 한 번씩 조빙토록 하고,[註077] 공물도 오직 그 나라 산물만으로 하되, 지나치게 사치스럽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짐의 뜻을 분명히 깨닫도록 일러주라.”[註078] 라고 하였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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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洪武五年[1372, 고려 공민왕 21년]表請遣子弟入太學,帝曰:「入學固美事,但涉海遠,不欲者勿強。」貢使洪師範、鄭夢周等一百五十餘人來京,失風溺死者三十九人,師範與焉。帝憫之,遣元樞密使延安答里往諭入貢毋數。而顓復遣其門下贊成事姜仁裕來貢馬,其賀正旦使金湑等已先至,帝悉遣還。謂中書省臣曰:「高麗貢獻繁數,既困敝其民,而涉海復虞覆溺。宜遵古諸侯之禮,三年一聘。貢物惟所產,毋過侈。其明諭朕意。」
[홍무] 5년(A.D.1372; 고려 공민왕 21) 에 자제들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황제가 말하기를,
“입학하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다만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와야 하니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강제로 보내지 마시오.”[註061]
라고 하였다.
공사[주062] 홍사범[주063]·정몽주[註064] 등 150여명[註065]이 경사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39명이었는데, 그 중에 사범도 끼여 있었다.[註066] 황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원나라의 추밀사[註067]였던 연안답리[註068]를 보내어 자주 입공하지 말도록 유고하였다.[註069] 그러나 전이 문하찬성사[註070] 강인유[註071]를 다시 보내와 말을 바쳤고,[註072] 하정단사[註073] 금서[註074] 등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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